제4의제국, 최인호
최인호의 역사소설이다.부산지역 모신문에 연재된 소설이 그 바탕이 된 듯하다.
전3권이지만 별로 치밀하지 않다. 여기저기 뭉텅이 뭉텅이 흩어져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르는 이야기의 구슬에 실을 꿰려든 노력은 가상했으나 다큐멘타리적 소설기법이 영엉성해서 영양가가 많이 모자란다. 대작가로서, "방대하였기에 좀 허술하였노라"고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없을 듯.
작가의 지난 역사소설들은 치밀성보다는, 일관되게도 행간과 여백에의 의존도가 높았던 느낌을 고려하면 재미와 완성도에 대한 순전히 개인적 기호를 논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화두는 무척 흥미롭다. 무게와 깊이를 원하는 자는 저 혼자힘으로 나가야만 한다..
지난 주말에 동경에 나갔다가 일본 황거 뒷문 근처에서 사진을 한장 찍었다.
어째 '히로히토'를 닮은 듯한 뻔뻔한 인상의 사십대..
최인호,여백, 2006년4월26일
주요배경및 등장인물(實存)은 다음.
1. 大成洞古墳
가야제국의 시발, 가야연맹의 맹주, 금관가야의 자리, 김해에서 발견된 고분군.
대성동3호 고분:
파형동기 6개, 벽옥제 화살촉등 왜계유물의 다량출토.
=바람개비 형상의 銅器. 통형동기와 같이 전형적인 일본고유의 유물로 알려져왔으나 대성동 고분에서 발견됨으로써 기마민족도래설의 주요증거의 하나로 됨.
2.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 1906~2002.
동경대 명예교수, 고대오리엔트 박물관 관장.
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일인자. 기마민족정복설 주창. 대성동 13호 고분에 감격.
3. 가루베 지온(輕剖慈恩): 1897~1970
일제시대 20년간 공주체재. 송산리5,6호고분발굴. 무령대왕 무덤은 그의 사후 1년뒤 발견. 저서: 백제유적의 연구
4. 仁德天皇(陵)
일본 16대왕. 광개토 고구려군에 금관가야 멸망 30년후에 건립된 ‘가와치‘왕조의 실질적 영주. 세계3대 대형고분중 하나. 前方後圓墳
獸帶鏡= 중국 후한의 겨울 모방 銅鏡. 무령왕능 출토된 “宜子孫獸帶鏡“과 거의 유사한 동경출토.
(참고: 金海의 歷史時間表- 금관가야왕국, 최종철, 미래문화사)
연대 |
시대구분 |
사료 |
출토물 |
묘제 |
역사 |
BC23~10세기 |
신석기 |
장유 수가리 패총 |
낚시바늘,돌도끼 |
돌묘지 |
단군조선 |
BC20~4세기 |
청동기 |
회현,대성동 패총 |
민무늬토기 |
고인돌 |
마한,진한,변한 |
BC4~1세기 |
초기철기 |
변한12국 |
창원다호리 쇠칼 |
옹관 |
BC57박혁거세 |
42~199 |
首露王 |
삼국유사.가락국기 왜 노국왕. 57년 후한 광무제의 금인수취 |
수로왕능 |
토광목곽 |
가락건국 신라4대 석탈해왕과 전쟁 |
199~259 |
2대 居登 |
신라에 가야왕자보냄. 請 화친
|
대성동 27호? |
토광목곽 |
209년 신라 내해왕 가야요청에 따라 포상8국난 평정 |
259-291 |
3대 麻品 |
왜 히미코 여왕 왜국통일(259년) 위나라 관인 수취 산라 아달라왕에 사신. |
대성동 29호? 오도소형 청동솥 |
토광목곽 |
신라 조분왕(231년) 석우로 장군으로 가야 감문국(김천) 정복 |
291-346 |
4대居叱彌 |
일본서기 신공왕후편,삼국사기 석우로 사건 |
대성동 13호? 철촉,통형동기,파형동기 |
토광목곽 |
첨해왕(249년) 고령가야(상주) 참공 |
346~407 |
5대伊尸品 |
백제 근초고왕.목라근자 파견,가야,왜연합 신라공격(375년) |
대성동39호. 통형동기 |
토광목곽 |
광개토(375-413) 임라종발성 정별.신라내물356~403 |
407-421 |
6대 坐知 |
일본 웅신천황기 가야인 대거도일 오까야마 길비 |
대성동2호? 통형동기,파형동기 |
토광목곽 |
신라 실성왕 부산 신라편입 |
421-451 |
7대 吹希 |
신라 눌지왕 고구려와 전쟁에 가야지원청함(일본서기) |
대성동3호? |
토광목곽 |
신라 눌지 |
451-492 |
8대 叱知 |
왕후사 건립 |
대성동 1호 |
토광목곽 |
배젝 개로왕 고구려 장수왕에게 피살. 문주왕 웅진 천도 |
492-512 |
9대 鉗知 |
|
대성동4호? |
횡혈석실 |
신라지증왕 가야 국경순방 |
512-532 |
10 仇衡 |
가야인 도일 대화정권에 참여 |
산청 구형왕릉 |
돌기단 |
532년신라 법흥왕에 멸망. |
제1권
제1부 대성동고분
大成洞古墳
1990년6월부터 8월까지 1차조사결과 두개의 목곽분 발견
2기조사결과 목관묘 8기, 목곽묘19기등 총37기의 무덤조사.
大成洞古墳 중심으로
북쪽 600미터에 龜之峰, 東쪽300미터 김수로왕릉,
南500미터에 가야인 취락유적 鳳凰臺 및 會峴里貝塚
지역의 속칭은: 애꼬(꾸)지. 즉, 작은 구지봉이란 뜻.
江上학설: 1048년. 기마민족정복설
동북아시아에서 기마민족이 남하하여 금관가야왕국을 거쳐 일본으로 상륙 정복.
일본기원의 지평을 대륙으로 확장하여 일본국민들의 열광적 지지.
일본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大和(야마또)조정의 뿌리가 북방과 한반도를 거쳐온 기마민족설.
(한국의 입장에서보면?
木槨墓
땅을 파 墓壙을 만든 후 주위를 나무로 만든 외곽방책을 두르고 시신과 부장물을 넣거 덮는 방식인바, 대성동에서 주곽과 부곽이 연결된 목곽묘 발견.
1호=5세기전반,두개의 묘실
2호=4세기후반,단독묘
1호고분의 순장흔적 발견=북방유목민족의 습성으로 고구려,백제,신라는 물론 동아시아 농경사회에서는 없는 습속.
부장물을 많이 넣는 厚葬=신라, 가야, 薄葬= 고구려,백제
筒形銅器= 원래 일본고유유물로 알려진 것으로 속에 방울을 넣어 긴 막대기에 꽂아 사용하는 일종의 물미. 물미=땅에 꽂기 위해 깃대나 창대끝에 끼워맞추는 끝이 뽀족한 쇠.
1호고분에서 8기나 대량출토, 금관가야고유의 유물로 일본으로 전파된 것일 가능성. 주로 지배자나 그아래 사제적 계층의 무덤에서출토
2호고분에서 巴形銅器 출토= 바람개비형 동기.
일본에서는 기원전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대략600년인 야요이 시대 유물.
제한적 출토품으로 미루어 왕의 무덤일 가능성
1,2호 고분에서 철제 마구의 다량출토=북방기마민족의 묘.
4호분= 橫穴式石室墓 돌을 쌓아가로로된 긴 석실
총39기중: 목곽묘 21기, 목관묘 8기, 석실묘 10기.
목곽묘=목재자원이 풍부한 지역에서 기원 북코카서스, 시베리아 스키타이고분. 동북아 고대기마민족 특유의 묘제.
B지구 18기의 묘는 중앙의 묘 1기(13호고분)를 중심으로 원형배치.
13호기의 바닥돌만 朱漆. 마구,철제 창,칼등 100여점의 무기출토,순장자의 뼈, 파형동기 6점출토.
제2장 狂詩曲
1927년(丁卯년)정월- 소화2년
가루베 지온: 와세다 졸업-평양숭실전문 역사교사- 公州고보 역사교사로 부임
공주 서기 475년~538년 사비천도까지 60년간 백제의 임시왕도.
멸망까지 130년간 부여가 백제의 마지막왕도였으나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완파된 바 대신, “공주”에 의미있는 유적이 존재할 것으로 판단, 조사 발굴에 매진.
* 공주=熊津=곰나루, 옛일본인= 구마나리(久麻那利), 중국인=固麻城
公州 宋山里
恩津 宋씨 선산. 노론의 尤庵 영수 宋 時烈의 묘가 있음.
武寧大王陵 벽돌의 문장:
무령대왕은 501년 웅진에서 왕위에 오른후 22년간 제위.
梁官瓦師矣= 앙나라 관청의 기와를 본떠 만든 것.
梁:중국 남조말. 雍州刺史 蕭衍 서력501년 南京공략. 502년제위에 올라 국명을 梁
이라 한다. 557년 陳나라에 멸망. 50년존속. 무제의 불교심취로 백제와 긴밀한 교류.
양무제:冊封: 行都督百濟諸軍事眞東大將軍 百濟王
공주의 연화문은 전부 8개의 蓮花紋으로 양나라 무제의 불교심취의 결과물.
삼국사기 백제본기:무령대왕: 諱는 斯摩. 諡號는 餘隆. 동성왕의 이복동생.
가루베가 발견한 6호고분은 내부가 빈 사변이 채색벽화로 장식된 가묘. 그는 1970년 73세에 사망. 그가 공주시절에 발견해고 모았던 유물의 행방은 아직 묘연한 상태.
무령왕능은 6호기 우편 5호기의 후면 삼각형을 이룬 지점에서 1971년에 발견.
제3장 13호 고분의 비밀
에가미 학설:
辰韓왕조가 규슈정복후 김해에 任那日本府 건설, 야마토 임나일본부설 부정.
북방기마민족-> 진한-> 伽倻진출-> 對馬島정복-> 壹崎->규슈상륙. 한왜연합왕국-> 세츠와 가와치 진출 왜국왕. 일본국의 수도는 “가야“
유사고분은 길림성 북부 부여족 목곽묘 129기.
부여는 기원전2세기 등장, 서기 494년 고구려에 항복때까지 700년간 만주를 지배.
주몽이 부여에서 나와 졸본부여(고구려)성립.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한가유역에서 백제 성립, 그 마지막 왕도를 ‘부여‘라 함.
결론: 대성동 고분의 순장흔적= 결국 순장풍습이 있던 ‘부여‘에서 온 것.
[대성동고분의 축조중단]의 이유는?
가야는 서력 562년 진흥왕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대성동 고분은 그보다 150년 전부터 축조가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제4장 天下爭覇
서력 399년 영락태왕 (광개토 대왕) 9년
26세의 태왕의 남순. 평양체재. 내물왕의 사신 도착, 백제와 왜의 군사작전 움직임 포착, 백제왕 아신이 가야,왜와 연합 신라침공.
前史
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전사. 고국원왕이 한사군중 황해도 지역의 대방을 토벌하자 백제는 중국과의 교역근거지 상실. 이를 회복하고자 고구려공격. 고국원왕의 전사. 광개토 대왕의 역습. 백제의 참패. 백제, 가야, 왜 엽합하여 신라침공 2강구도로의 재편을 노림.
제5장 乾坤一擲
庚子년 공개토왕 9년,서력 400년 고구려군 5만 남하.
임라가라 종발성에서 대접전. 연합군 지휘는 가야국 5대 이시품왕, 그 아들 6대 좌지왕이 된 김질.
광개토왕은 고구려에 인질로 와있던 실성을 공격군 대원수로 임명 승리하게 하고 그는 내물왕을 이어 신라의 실성왕이된다. 이후 고구려에 의한 구원이후 신라는 약 100년간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 실성왕은 광개토왕의 사후 장수왕 시대가 되자 신라에서 실각 암살된다.
[광개토대왕 비문]
영락10년.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은 곧 함락. 왜구들은 모두 흩어지며 달아났다.
어디로 달아났는가?는 밝혀지지 않고있다. 금관가야는 종발성의 패전이후에도 150연간 존속. 진흥왕에 의해 562년 멸망시까지 . 왕력도 4대나 더 지속되어 최후 구형왕대에서 완전멸망. 종발성 전투는 사실상 금관가야의 멸망 및 전기 가야연맹의 와해.
서기 401년, 사실상의 금관가야 멸망이후, 왕족과 가야민은 대량으로 왜로 탈출.
그수는 100만명 이상으로 추정.(?)
좌지왕 이후의 가야왕은 적통의 계승자라기보다 잔존수장들에 지나지 않는다.
제2부 百舌鳥
제1장 仁德天皇
금관가야 멸망후 가야인들의 대규모 집단망명지 오사까 가와치(河內), 세츠(攝津).
堺(사카이)는 이즈미, 가와치, 세츠의 중심도시.
사카이는 일본속의 자유도시, 오다 노부나가도 감히 정복하지 못한 땅.전국시대에도 독자적 국제무역, 철포등을 갖춘 자치권을 가진도시.
모즈역(百舌鳥역)일대에는 인덕천황릉을 비롯 백설조 고분군의 산재지. 잔존고분 총 46기.오사카만을 내다보며 표고20미터에 산재.
16대 인덕천황의 장사지가 百舌鳥野陵
전방후원분의 전형적인 일본 고분.=열쇠구멍 고분
百舌鳥의 독음은 모즈
飛鳥= 아스카
삼국지의 위서동이전: 큰 새의 깃털로 장사를 지냈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오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덕천황 재위는 서기 433년~519년까지. 광개토대왕의 금관가야멸망 30년후 성립된 가와치 왕조의 실질적 영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굴설
1908년 보스턴 박물관 소장품 도록중
伝 “仁德陵出土品” 4점;
환두대도 손잡이= 무령왕릉의 환두대도와 유사‘
수대경-무령왕릉의 의자손수대경 유사 직경 23.2로 동일하며
현무,주작등 사신과 삼족오, 두꺼비등 각종 동물무늬도 유사한 칠자경.
무령왕릉의 의지손수대경과 같은 거푸집에서 찍은 수대경이 일본에서 발견,
하세족: 가야도래집단, 토기 및 철제련기술자 및 고분조영자 집단.
千滿宮.부근에 應神天皇의 릉이 있음.
왜의 실징적 건국자이자 가야인들을 이끌고 동정에 나서 왜의 본토를 정복한 신탁의 생산은 應神.
제2장 응신천황
응신천황은 불가지의 세계로부터 홀연히 출현한 수수께끼. 이후에 출토되는 후기부장품에서 주로 기마제의 유물이 출토되기 때문.
응신은 백제계 또는 가야계의 인물로 실질적으로 천황국가의 시조.
가야도래인의 숫자는 약 130만명에서 150만명.
제3장 斯麻大王
제1장 백제묵시록
백제25대 무령왕 영동대장군 사마대왕 서기 462-523년.
제2장 신들의 바다
무령대왕의 탄생지 各羅島
일본서기 응략천황 5년조. 6월1일
임산부가 츠쿠시의 각라도에서 아기를 낳았다. 이곳은 응신천황이 아야유민을 이끌고 상륙한 지점을 말한다. 후쿠오카 인근.
츠쿠시= 큐슈로 변형된 것.
加唐島=各羅島는 무령대왕의 탄생지.
501년 사십세에 그는 백제로 귀환.
제3장 사마왕의 탄생
제4장 목관의 비밀
성왕이후 의자왕까지 능산리고분 및 무령대왕의 고분목관의 관재는 금송으로 일본 남부지방에서만 자생하는 종류.
따라서, 모두 왜에서 반입한 것,
제5장 대왕의 부활
[스다하치망 신사 인물화상경의 명문]
사마대왕 계미년(503년)8월10일 대왕사마는 의자사가궁에 있는 繼體王의 장수를 염원해 백동 이백간으로 이 거울을 만들어 보낸다.
무령대왕은 40세에 왜국에서 백제로 환향해 왕권을 다시 세우고 2년뒤 화상경을 만들어 동생인 계체천왕에게 하사한 것.
무령이 백제25대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현지에서 토호에게 암살된 때문. 곤지는 결국 무령을 백제로 보내 왕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즈음 왜는 가야계왕권의 쇠퇴기. 본국에서 이미 가야의 세력은 지리멸렬. 가야계 마지막 왕 무열의 뒤를 이은 자는 26대 계체천황. 그는 곤지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 형님이던 공상왕과는 달리 무령과 친밀한 사이. 507년 즉위.
제4부 龜旨歌
제1장 龜旨峰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에 따른 인도 아유타국 출신 허황후의 존재. 가야는 북방계와 남방계의 혼혈체.
제2장 수로왕릉
가락국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
神魚像과 太陽紋 인도 아요디야 지방에서 흔한 문장.
태양문=태양=파형동기 문양의 유사성 = 일장기의 태양
결국 가야의 신화는 일본청세의 신화와 같은 것이라는 결론.
제3장 붉은 돚배
제4장 婆娑塔의 비밀
제5장 제4의 제국
13호구분의 주인은 숭신천황일 가능성
결론: 일본건국신화=가야건국신화와 유사성이 강하다.
저자의 결론, 가야 =현 일본의 모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