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學思想

유학사상-주요인물(본토)

eyetalker 2005. 3. 24.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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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등장인물을 알아야..뭔가 이야기를..

 

공자(孔子)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출신. 아버지가 나이 70세, 어머니가 16세때 출생. 어머니는 숙량흘, 둘째번 처로, 그의 본처는 딸 아홉과 백치 아들하나를 낳았었다. 머리위가 오목하여 언덕 같으므로 이름을 丘라하고 니구산에 빌어 낳았다하여 자를 仲尼라 했다.

유가의 사상이 제자백가의 경쟁에서 살아 남은 것은 그 이론이 시대의 통치자나 새로운 왕조를 연 왕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소가 있었기 떄문이다. 天命의 사상이 그것.하늘이 명한 바 왕이 되었으니 왕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군주가 한 국가를 이끌어가는 데 적합한 논리와 사상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의 학설은 도가와 법가의 이론가들에 의하여 현실적이지도 못하고 이상적이지도 못한 것으로 무시되고 조롱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자사가 나오고 맹자가 춘추전국을 유세하며 제자백가의 사상가들과 논쟁을 벌이고 뒤이어 순자가 나오며 천천히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유학을 국가의 근본적인 이념으로 확정하며 그 위치를 확고히 굳히고 영향력을 범지역적으로 확대하게 된다.

자사 子思 [BC 483?~BC 402?]

중국 고대 노(魯)나라의 학자.
주요저서 : 《중용(中庸)》,《자사자(子思子)》

이름 급(伋). 자사는 자(字)로서 공자의 손자이며, 4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저자로 전한다. 전 생애를 주로 고향인 노나라에 살면서 증자(曾子)의 학(學)을 배워 유학의 전승에 힘썼다.

 

맹자는 그의 제자의 제자이며,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이 학통(學統)은 송학(宋學)에서 특히 존중된다. 자사학파의 사상을 전하는 책으로 《자사자(子思子)》가 있다.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중용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일상 윤리가 그의 사상의 중심이다

송대에 이르러 재도약하기 전에 유학에서 주로 설파 내용은 소위 君子의 道였다.

- 군자는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옳고 그른 것을 정 한 것이 없으며 오직 義를 좆아 의와 함께 살아가느니라.-

공자 맹자의 학설에서 부족한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면은 순자에 의하여 보완되어 졌다.

순자의 논리는 맹자보다 훨씬 정밀하고 설득적이다. 맹자는 변설이 주특기였고 때로는 어거지 논리도 구사하였지만 순자는 현실에서의 문제들에 대하여 훨씬 더 깊고 광법위한 이론을 전개 시켰다. 이러한 논리전개의 바탕은 性惡說이다. 인간의 타고난 性은 惡하기에 교육울 통해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로써 본성을 극복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순자의 성악설은 맹자의 성선설에 이론싸움에서 뒤지게 되고 이후 맹자의 성선설이 유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는다. 이후 오직 당위와 명분만이 현실에 대한 군자의 대처방법이 된 것이다. 현실의 윤활유인 타협이나 절충은 군자가 경계할 바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극단적인 유교문화속에서는 타협이나 절충은 자리를 잡을 곳이 없게 되어 버린다.

순자 荀子 [BC 298?~BC 238?]
중국 전국시대
주요저서 : 《순자》

성 순(荀). 이름 황(況). 조(趙)나라 사람. 순경(荀卿) ·손경자(孫卿子) 등으로 존칭된다. 《사기(史記)》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하고, 진(秦)나라와 조나라에 유세(遊說)하였다. 제나라의 왕건(王建: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稷下)의 학사(學士) 중 최장로(最長老)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초(楚)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 ·자궁(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思想史的) 위치는 서양 철학사(哲學史)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군(飴)’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墨家)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秩序體)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法家的)으로, 개인의 ‘분수’ 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 ·합목적적 격률(合目的的 格律) ‘성왕(聖王)의 제(制)와 예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천적 합리론(合理論)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하늘[天]’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며,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명가사상(名家思想)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實念論的) 입장에서 개념 종속 관계와 범주론(範疇論)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名辭)의 타당성은 합목적사회관습(合目的社會慣習) ‘왕제(王制)’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노장(老莊)의 변증적(辨證的) 사변(思辨)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欲)과 지(知)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自主的目的體)로 보는 유가(儒家) 부동(不動)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原存在)와 의의활동(意義活動)을 구별하고, 특히 후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人爲)인 ‘위(僞)’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성(性)은 악(惡)이고, 선(善)한 것은 위(僞)’라는 성악론자(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맹자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生得的)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 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歸一)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학(學)’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深化)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士)와 군자(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完全體)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韓非) ·이사(李斯)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秦) ·한(漢)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 ·한초(秦漢初)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 춘추(呂氏春秋)》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 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巨步)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實踐合目的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唐)나라의 양량(楊倞)이 편(編)의 순서를 바꾸고 주(註)를 붙여 《손경자(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문인(門人)의 설(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賦) 10편의 저작이 있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
이후 유학의 관념에서 파생된 여러가지 제도와 규칙들에 의하여 한나라는 조직되어졌다. 마침내 공자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다. 이후 유학의 사상은 한나라를 이어 당,송을 거치며 국력과 더불어 주변국가로 퍼져나갔다.

인간관계에서의 풍부한 개인적인 수신제가론과 인간에 대한 변별론 등 기득권층에 의하여 옹호될 수 밖에 없는 유학의 사상은 주변국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침략국까지도 그 속에 함몰시켜 버렸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순자이후의 유학은 더 이상 발전할 것이 없어서인지 큰 발전을 못하게되고 형이상학적인 면에서는 도교와 불교사상에 뒤쳐지게된다.그러다가 천년을 지나 송나라때에와서 주렴계에 의하여 다시 꽃피우기 시작했다.

 

주돈이 周敦燎 [1017~1073]
중국 송(宋)나라의 유학자.
주요저서 : 《태극도설(太極圖說)》,《통서(通書)》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주(道州:湖南省 道營縣) 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만년에는 루산산[廬山] 기슭의 염계서당(濂溪書堂)에 은퇴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염계선생이라 불렀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왕안석(王安石)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태극(太極:無極)으로부터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도해(圖解)하여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태극→음양(陰陽)의 이기(二氣)→오행(五行:金 ·木 ·水 ·火 ·土의 五元素)→남녀→만물의 순서로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논하고, 인간만이 가장 우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정(中正) 인의(仁義)의 도를 지키고 마음을 성실하게 하여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의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본래 하나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저서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가 있으며, 수필 《애련설(愛蓮說)》에는 그의 고아한 인품이 표현되었다. 남송의 주자(朱子)는 염계가 정호(程顥) ·정이(程燎) 형제를 가르쳤기 때문에 도학(道學:宋代의 新儒敎)의 개조라고 칭하였다.

이후 유학은 장횡거와 주렴계의 제자인 정이천, 정명도 형제가 유학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뒤이어 나회암, 주희, 육상산,왕양명등으로 이어지며 이론, 윤리,도덕,교리적인 면외에 형이상학적이고 사상적인 면까지 다시 발전하게 되었다.

정호 程顥 [1032~1085]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출생지 :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주요저서 : 《정성서(定性書)》,《식인편(識仁篇)》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시호 순(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존칭으로 명도선생이라 불리고, 동생 정이(程燎:伊川)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알려졌다. 아버지 정향(程珦)이 남안(南安:江西省 大庾縣)의 판관이었을 때 주돈이(周敦燎:濂溪)를 한번 보고 아들 형제를 그의 제자로 입문시켰다고 한다. 26세 때 진사가 되고, 산시성[陝西省] 후셴현[且縣]의 주부(主簿)로 출발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택주(澤州:山西省) 진청현[晉城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큰 치적을 올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 신종(神宗)의 부름을 받아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조정에 등용될 뻔하였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사하였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에 입각하여 혼일적(渾一的)으로 천지의
생의(生意)를 체험하는 데 있었다
. 그는 제자(諸子) ·노장(老莊) ·불교도 공부하였으나, 결국 유학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질서지우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순응하여야 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저서에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 시에 《추일우성(秋日偶成)》 등이 있다. 그의 전기는 주자의 《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서, 유저(遺著)는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이 발전시킨 유학은 주희에 의해 다시 공자이후 집대성되었다. 이를 정주학 또는 주자학이라 한다. 이는 고려말 안향에 의해 도입되어 길재, 이색,정몽주등에 의해 연구되어 졌다.

 

 

 

주자 朱子 [1130~1200]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출생지 : 중국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주요저서 : 《사서집주(四書集注)》
자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戒) ·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張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譬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 ·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 ·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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