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學思想

유학사상-주요인물(고려,조선)

eyetalker 2005. 3. 24.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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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서며 유학은 새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조선의 유학도 조선 특유의 사상적 이론적 발전을 하게된다. 그러나 너무 주자학 일변도였다. 조선초에 이미 조한보와 이언적이 태극무극논쟁을 한 바 있고 16세기에 들어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이 퇴계가 수정을 가하고 이 수정에 대하 기대승이 반론을 제시하면서 부터 성정이기에 대한 기나긴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사단칠정론이라고 하는 性과情에 대한 논쟁이다.

이언적 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문신.
주요저서 : 《구인록》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등
주요작품 : <일강십목소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 (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 ·장령 ·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 ·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 ·형조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에 실려 있다.


이후 율곡과 성혼간에도 이 논쟁은 다시 벌어졌었다. 성정론은 조선시를 통하여 갖가지 당리당략과 이해와 관계하며 파벌의 형성에도 한몫하게된다. 조선후기로 접어들어서 부터는 공리공론을 일삼는 유학을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실학으로 나타난다.

성혼 成渾 [1535~1598]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출생지 : 서울 순화방(順和坊)
주요저서 : 《우계집》 《주문지결(朱門旨訣)》 등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 ·묵암(默庵). 시호 문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 ·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 ·황신(黃愼) ·이귀(李貴) ·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602년 전일에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5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5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기대승 奇大升 [1527~1572]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출생지 : 전남 나주(羅州)

본관 행주(幸州). 자 명언(明彦). 호 고봉(高峰) ·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전남 나주(羅州) 출생. 1549년(명종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주서(注書)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삭직(削職)되었다가, 1567년(명종22)에 복직되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執義)가 되고,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다가, 1570년(선조3) 대사성(大司成)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후에 대사성에 복직되었는데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 사퇴하고, 1572년 다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 호남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1590년(선조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저서에는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정지운 鄭之雲 [1509~1561]
조선 중기의 학자.
출생지 : 경기 고양(高陽)
주요저서 : 《천명도설(天命圖說)》

본관 경주(慶州). 자 정이(靜而). 호 추만(秋巒). 경기 고양(高陽) 출생.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조화(造化)의 이(理)를 규명한 뒤, 이황(李滉)을 만나 1553년(명종 8) 수정을 받았으며, 이것이 뒷날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되었다. 마음이 곧아 남과의 교제에도 퍽 신중하였으며, 벼슬에 천거되었어도 사양하였다. 1561년 천마산(天摩山)에 유람을 갔다가 병이 나서 고향으로 되돌아오다 죽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천명도설 天命圖說

활자본. 1책. 조선 명종 때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1509∼1561)이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에게 문의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교열(校閱)을 받아 저술하였다.
제1절 천명에서 제10절의 존성론(存省論)으로 끝마쳤다. 퇴계의 도설서(圖說序)를 아울러 붙여 1640년(인조 18) 전주부윤(全州府尹) 한흥일(韓興一)이 각판(刻版)하였다.

논사단칠정서 論四端七情書

이 논저는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제16∼17권에 수록된 것으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뒷날 조선시대 성리학파(性理學派)의 연원이 된 글이다.

 

이 논저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주고받은 서신 형식으로 논변되었는데, 당초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의 발단은 정지운(鄭之雲)이 지은 《천명도설(天命圖說)》을 퇴계가 고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정지운은 자기의 《천명도설》을 고쳐달라고 퇴계에게 요청하였고, 이에 대하여 퇴계는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發)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한다”는 구절을 “사단은 이(理)의 발이요, 칠정은 기(氣)의 발이다”로 고쳤으며, 이것을 기대승이 보고 퇴계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이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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