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Lao

라오이야기2

eyetalker 2007. 3. 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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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나는 프린스턴의 4학년생이었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라오스란게 뭔지 알 턱이 없었다. 몇 달만 지나면 나는 대학의 안락에서 놓여나 독립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적도 좋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다스릴 수 있을만한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돈 많은 투자은행이나 투자자문사, 아니면 당시만 해도 금방이라도  뛰어들수 있었던 인터넷 벤처사업, 대학원에서의 연장된 학생 생활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바른 선택인 것 같지 않았다. 친구들이 양복을 차려입고 면접장을 찾아다니는 동안 나는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질 일차통과자, 2차 시험, 최고의 급여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최악의 삶의 질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나는 톱텐 리스트와 랭킹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엇다. 거의 이십년간에 걸친 중단 없는 공교육 끝에 나는 휴식이 필요했다. 누군가 나를 회의실에 바로 세워 앉혀 놓기 전에 나는 교실바깥에서의 어떤 배움을 필요로 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서열화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전이 필요했다. 그럴만한 자격을 얻을 일말의 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나는 곧 바로 안락과 특권의 세계로 태어났다. 런던, 뉴욕 그리고 워싱턴 디시에서 자랐고 각 단계마다 엘리트만의 사립학교에서 교육받았다. 물론 나는 주어진 그 모든 것에 감사했고 성공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지만 마치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비넝쿨로 뒤덮힌 대학교 교문 뒤에서 나는 뭔가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있는 중 이었다. 나가야만 했다. 동아시아학부 출신으로 일본에서 살며 일해본 적도 있었다. 동경의 일본의회 의원보좌관으로 일해본 적도 있었고, 그때는 확실히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창때 전국적으로 날리던,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남장 가수그룹의 멤버로 활약했던 중년의 여자 의원과 가라오케에서 같이 노래하곤 했던 것은 분명히 큰 경험이긴 했다. 그러나 한번에 기껏해야 몇 달 정도 머물렀을 뿐이었고, 개발도상국에서 살아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들은 케냐에 보내진 최초의 평화봉사단 그룹의 일원이었고 수십년 전, 그들의 케냐에서의 경험은 우리가족사의 중심화제였다. 부모님들은 당시의 케냐가 직면해있던 문제들을 거의 해결하지 못했다 - 내 느낌으론 평화봉사단은 아마도 그 36년의 역사상 개도국에서 더 많은 문제들을 초래한 듯하다 - 하지만, 그들의 집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에서의 삶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의 인식이 그들의 세상에 대한 접근방식에 미친 내적 영향을 생각하면 항상 감동하게 된다. 내가 미국에서의 안락하고 둘러쌓인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 것도 사실이긴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나는 단지 부모님이 나에 앞서 내렸던 그 선택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겨울의 어느 아침, 동양학부가 위치한 존스홀의 교실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존스홀은- 단지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때문이 아니라 -  프린스턴 안에서 내가 가장 애호한 건물이었다. 캠퍼스의 중심에 자리한 자그마한 고딕의 보석인 존스홀에는 한때 명망높던 프린스턴의 수학과가 자리 잡았던 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 교수의 방은 112호였다.) 수학과는 당시 이미 오래전에 존스홀을 떠나 캠퍼스 서쪽에 세워진 현대식 고층건물로 자리를 옮겼고 건물은 구구단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어하는 대학사학년짜리 우리들에게 남겨졌다. 나는 같은 학부의 친구들, 일본어나 중국어 강사들 그리고 아시아사, 아시아문학교수들로 붐비는 흐릿한 조명의 홀과 교실이 편하고 좋았다. 학과장인 피터슨 교수는 일층 구석의 넓직한 사무실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나날을 중국지성사 편역에 몰두 하고 있었는데, 내가 상상하기로는 공자나 맹자의 저술로부터 핵심적 구절을 떠올리고 숙고하느라 멈칫 멈칫거리며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을 듯하다. 그의 사무실을 지나칠 때마다 그의 책상 앞 카펫위에 엎드린 그의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그의 사무실을 드나드는 학생이나 직원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피터슨 교수의 개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품고 있을 이유라고는 도무지 있을 성 싶지 않았다.


그날, 아마 나는 그다지 서두르고 있지는 않았든 듯하다, 왜냐하면 교실로 가는 길에 벽에 붙여둔 한 공고문이 내 눈을 끌었기 때문이다. 광고는 ‘아시아속의 프린스턴‘이란 프로그램으로 최근 졸업자들에게 아시아지역에서 한 두 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도 그 프로그램에 대하여는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일이라는 것은 내가 이미 공부했었고 가본 적도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고등학교나 대학의 영어강사자리 뿐 이었다. 다시 가본다는 것은 별 재미없는 일이었다. 다소 흥미를 끈 것은 다른 수많은 정보의 바다 귀퉁이에 적힌 작은 광고였는데, 라오스에서 일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일이란, 라오스인민민주주의공화국(Lao PDR) 관광청의 언어및 마케팅 컨설턴트 자리였다. 관광청, 즉 NTA (National Tourism Authority),는 수도 브양티엔에 있는 관광개발, 기획, 진흥을 담당하는 라오스 정부의 중앙부처였다. 그것이 그 직업소개의 전부였고 프로그램 사무국의 직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시아속의 프린스턴’이 지금까지 라오스에 사람을 파견해 본적은 없으며 사실 그들 스스로도 그런 일자리가 실제 존재하는 지 여부도 잘 몰랐다. 그들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전혀 정보가 없었고 보장해 줄 수 있는 것 또한 있을 수 없었다. 돈에 관한한 라오스 정부는 일전 한 푼 지급하지 않을 터였지만, ‘아시아속의 프린스턴‘이 숙식만큼은 보장해주는 조건이었다. 여행과 기타 비용은 일절 자비부담이었다.


그 시점에 라오스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전혀 없었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맥락을 통하여 참고적으로 라오스에 대하여 한두번 들은 바는 있었던 것 같다. 6,70년대, 점차 기세를 올리던 베트남과 라오스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을 훼방하기 위하여 미국은 엄청난 폭탄을 라오스 북부지역에 쏟아부었다. CIA는 , 지금은 그들 중 많은 수가 미국에 살고 있는 데, 라오스의 소수민족인 몽족을 동원, 게릴라 전력으로 훈련시키고 지원하였다. 1960년에, 대통령직을 존 케네디에게 넘겨주기 직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게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전역의 열쇠”라고 언급했다.  다시말하면, 라오스가 공산진영에 넘어가면 전 지역이 뒤따를 것이라는 말이었다. 어떤 시점에는 브양티엔의 미대사관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스는 지금 주요 이벤트의 보조극이요, 단지 역사적 각주에 지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라오스의 자리는 별로 고려되지 않는 형편이고 프린스턴의 학교에서도 교수나 급우들 그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화제에 오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라오스에 대하여 아직 잘 모르는 상태였긴 하지만 나는 이미 스스로 그 자리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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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A의 그 자리에 채용이 결정된 후 나는 라오스에 관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추려냈다. 급하게 알아내야할 정보가 많았기에 당시에 등록한 교과목에 대한 관심은  많이 축소되어 있었다. 나는 재즈의 역사라든가 미군의 일본점령과 관련한 공부를 즐겼는데 이 주제들은 동남아시아의 이 작은 나라를 배워야할 필요라는 '긴급성'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라오스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에 대해 씌어진 것이 적을 뿐 아니라 라오스에 대해 만들어진 몇 가지 영화도 그리 좋은 편인 것은 아니었다. 첫걸음으로, 학문을 찾는 훌륭한 학생이라면 가봄직한 곳을 찾아다녔다. 도서관. 다 합치면 50마일이 넘는, 프린스턴 대학의 미로와도 같은 파이어스톤 도서관 서가 어디선가 내가 찾는 라오스에 대한 질문의 답변 몇 가지 정도는 분명히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아시아의 맹주들에 관한 수백의 서적사이에 파묻힌 라오스에 대한 몇 가지를 구할 수 있기는 했다. 나는 이 정보를 라오스의 역사와 문화의 정수를 이해하기 위한 손잡이로 이용했다.


말려들기에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라오스지도를 보면 처음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나라의 가장 특이한 잇점 이기도 한, 아니면 불리이기도 한 사태를 깨닫게 된다. 이 나라는 완전한 내륙국이다. 북으로는 중국, 버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태국과는 서쪽, 베트남과는 동쪽 그리고 캄보디아와는 남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세기 동안 국제무역과는 담을 쌓고 지내왔고 동시에 그 주변국들과 다른 외세의 거친 개입의 수난을 겪어왔다. 시암과 중국의 반복적 침략은 이 나라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 의하여 접수된 후 베트남, 캄보디아와 함께 인도차이나로 병합되어 식민치하에 떨어지기 이전의 일상적 사태였다. 1950년대에 라오스가 독립한 뒤 이 나라를 공산치하에 떨어뜨릴 수 없다는 미국의 자각은 이 나라에 대한 미국의 집요한 개입을 불러왔다. 냉전의 최고조기에 소비에트 연방 또한 라오스의 웰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했다. 한편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지역 주요 교역로의 교차로로서의 라오스의 위치를 지본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고 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곧 나의 동료가 될 NTA의 친구들이 품고 있던 라오스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다가갈 열쇠였다.  


라오스는 대략 영국의 크기에 해당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고 세계에서 길이로는 12번째로 긴 메콩강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고 있다. ‘물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 위대한 강은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를 흐르는 길이를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긴거리의 라오스땅을 거의 아무런 거침없이 흐른다. 이것은 아마 곧 변할 수 밖에 없다. 내가 1998년에 라오스를 향해 떠났을 때, 적어도 이십 개 이상의 댐 축조계획이 기안단계에 있었으며 내가 거기 있던 동안에도 거의 매주 간격으로 새로운 수력발전 프로젝트가 가동을 시작했다고 들었었던 것 같다. 메콩강의 계곡은 라오스에 최고의 농업지대를 제공하고 있고 - 쌀과 더불어- 생선은 라오스민중의 주식의 하나다. 안남산맥은 라오스 강역의 거의 절반을 메콩강과 평행하여 달리고 있다. 북부지역이 험준하고 뾰죽한 경사면의 산악지대인 반면, 남부는 라오스산 커피의 대부분이 재배되는 볼라밴 분지같은 기름진 평야의 혜택을 받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은 ‘푸비아‘라는 곳으로 동북지역의 연접하여 이어지는 수풀무성한, 구르는 듯한 구릉으로 이어진 야르분지의 바로 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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