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Lao

라오이야기 3

eyetalker 2007. 3. 1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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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스는 얼핏 듣기엔 아름다운 땅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기후에 대해 알고난 후 약간 달라졌다.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 처럼 이 지역은 대표적인 3개의 주요계절이 있다. 5월7월 사이 몬순의 도래로 표시되는 우기는 늦게는 11월까지 계속될 수도 있다. 이 시기에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하며 또한 눅눅하다. 저지대의 한낮기온은 평균 삼십도를 오르내리고 산지에는 약 25도전후다. 몬순에 이어 11월부터 이월까지의 건조하고 신선한 계절이 이어지고 이 시기에 메콩강 계곡의 온도는 낮게는 15도까지 하강한다.  세 번째 계절, 건조하고 더운 시기는 이월종반에 시작해서 5월까지 지속된다. 3월,4월에 브양티엔의 온도는 작열하는 38도까지 올라가곤 한다. 나는 어두칙칙하고 안개뿌연 런던에서 태어났고 프린스턴에서와 같은 기후에서 최고의 평안을 느낀다. 연중 단 4개월동안만 열기로부터의 안도를 제공하는 그런 기후를 어떻게 생존해 낼 것인지?

    작업을 계속해나가다 라오스의 비상한 인종적 다양성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 인구는 대략 오백만 미만이고 1평방키로미터당 인구밀도는 단 두사람으로 아시아 지역 최저의 인구밀도를 보인다. (인접한 베트남의 인구밀도는 1평당 키로미터당 230명이다.) 라오스 정부는 그들의 주거고도에 따라 국민을 3개의 종족으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라오 쏭’(高山族), ‘라오텡’(低山族) 그리고 ‘라오롬’(低地族)이다. 인구의 약 반수는 ‘라오롬’, 20-30%는 ‘라오텡’, 그리고 10-20%가 ‘라오쏭’이다. 이것은 다분히 자의적인 분류로서 라오스에는 최소 68개의 서로다른 종족그룹이 있고 그들은 각기의 언어적, 종교적 전통과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라오롬’은 메콩강 계속에 주거하면서 수도작(벼농사)에 종사하고 소승불교를 신봉한다. 라오텡은 중고도의 산지 경사면에 주거하면서 자연물에 존재한다는 정령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세가지 그룹에서 가장 저열한 수준의 삶을 영위한다. ‘라오쏭’은 해발고도 약 1000미터 이상의 고지에 주거하며 전통적으로 천수답이나 아편의 경작에 의존해왔다. 라오스의 화교와 베트남사회는 매우 강력하며 도시중심부의 실업계를 지배하고 있다.

    불교는 라오스의 주요종교이며 인구의 무려 2/3가량이 소승불교신자이다. 13세기후반, 14세기 초반에 전래된 불교는 통일 란샹왕조 (백만코끼리의 왕조)의 태조인 ‘파굼‘왕에 의해 열렬히 보급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하여 동남아시아를 거쳐 라오스에 이른 소승불교는 불교의 두 종파중 초기의 것으로 보다 순수한 형태를 띠고 있다.

    다른 분파인 대승불교는 북부및 동부 아시아지역에 퍼진 보다 확장적인 형태의 불교이다. 소숭불교의 목적은 열반에 이르는 것, 즉 지상에서의 육체적 실존의 종말, 따라서 모든 번뇌의 종말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라오스 불자들은 다수 ‘라오롬‘족으로 지역의 사찰에서 스님들에게 정기적으로 돈과 음식을 시주하면서 이 목적을 갈성하는데 편리를 구하거나 도움을 받고자 한다.

    라오스의 문화와 종교에 대해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라오스행에 대한 기대가 커져갔다. 나를 가장 흥미롭게 만든 것은 대단히 종교적인 개발도상국으로서의 라오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라오스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라오인민민주주의공화국’(사타라트나랏 파사티파타이 파사손 라오)은 미군이 베트남에서 패퇴한 여파로 공산주의 라오인민혁명당이 라오국왕정부를 접수한 1975년 12월2일 성립되었다. 왕은 폐위되고 왕조는 폐쇄되었다. 새로운 계급의 혁명당원들이 브양티엔의 정부부서의 자리를 차고 앉았다. 오늘날까지 당은 국가의 주요지배기구로서 존재하며 인민들의 일상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내 권력은 정치국 9인위원회와 49명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 종신 서기국에 있다. 현재 3개기관의 총비서는 동일 인물, 즉 대통령 ‘캄타이 시팡돈’으로 원래 라오스 북부 산악지대 깊숙한 동굴에 세운 비밀본부에서 대미항쟁을 지휘한 혁명당원들을 지칭하는 원조 ‘굴사람들’중의 한 사람이다. 국회는 유일한 입법기관이다. 거의 대부분이 당원이기도 한 대의원들은 인민대중에 의해 선출되며 중앙위원회 결정과 국무총리령을 원하는 대로 인준하기 위해 년중 단 한번 회합한다. 투표자체가 강제적이었고 또한 철저하게 통제된 채 치러진 1997년의 총선에서는 무소속후보는 단 4명만이 입후보가 허락되었다. 당에 대한 진정한 반대세력은 물론 자유언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미국에 있는 내 친구들 대부분은 왜 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내가 가장 흥미롭게 여긴 점이 바로 이러한 라오스에서의 삶의 양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왜 정치적 자유가 제한되고, 사람들이 나서서 말한다고 해서 감옥으로 끌려들어가는 그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려 하는 지 의아해 했다. 그리고 또한 공산주의는 벌써 끝난 거 아니었나? 왜 실패한 것이 분명한 정치적, 경제적 실험을 가지고 이제 사 니가 나서는거지? 그러나 나는  ‘우랄의 후방‘의 작가이자 저 유명한 러시아 철강도시의 노동자였던  존 스콧을 모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존 스콧은 공산주의 실험에 매료된 몇몇 서방인들과 함께 소비에트적 삶의 즐거움과 집체주의의 엄청난 성공을 보도하려는 목적으로 1930년대에 소비에트 연방을 여행했었다. 물론 내가 대학4학년이 되기 훨씬 오래전에 그는 명성을 잃었고 공산주의 또한 자리를 잃었다. 나는 자유시장경제를 대체할 어떤 다른 이념을 찾고자한 것이 아니었고 단지 궁금했던 것뿐 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라오스의 공산주의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국민의 80%가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이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어떻게해서 자리를 잡고 있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임금 노동자라곤 눈을 씻고 둘러봐도 찾을 수 없는 이 땅에 맠스레닌주의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뭉쳐일어나 지배자들을 뒤엎을 프로레타리아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1975년 정권을 잡은 뒤, 공산주의자들은 라오스 사회에서 급격한 변화를 추진했다.정권은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농토를 집단화했으며 약 4만의 도시인들을 지방의 재교육 캠프로 하방시켰다. 결과적으로 30만 이상의 라오스인들이 메콩강을 건너 태국의 난민촌으로 망명했고, 이어 미국, 프랑스 그리고 호주의 새로운 정착지로 옮겨갔다. 하지만 초기의 이러한 공산주의적 정열은 엄청난 실패와 민중의 반발을 불러왔고 1979년 정권은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꿔 농업, 금융정책과 상품가격체계의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브양티엔같은 도시중심부의 경제는 개인기업이나 사유재산권에 대한 제한이 풀리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변모하기 시작했다. 서방으로의 회전은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계기로 가속화하였고 동시에 1980년대만해도 라오스가 받아들이든 모든 대외원조액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던 러시아로부터의 원조도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러시아 기술자와 외교관들이 철수하자마자 거의 동시에 라오스 정부는 이전의 지원국을 대체할 수 있는 스웨덴, 일본 그리고 호주 같은 기부국가들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원에 대한 댓가로 러오스정부는 추가적인 경제민주화 조치를 취하는데 동의했고 동남아지역에서는 가장 자유주의적인 외국인투자법을 도입했다. 지금 미국과 태국은 이나라에 대한 최고액 투자국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1975년 이래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라오인민혁명당은 여전히 권력을 틀어쥐고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정부와 더불어 그들은 초강대국 미국을 물리쳤으며 라오스는 그러한 승리의 자부심은 그대로 온존되고 있었다. ‘굴사람’들은 미제국주의자들과의 위대한 전쟁에 그들의 목숨을 걸었으며 따라서 지금 사라져 버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전쟁유산에 대해 내가 알아낸 것, 즉 풍경속에 점점이 박힌 수많은 폭발구덩이로부터 매년 지뢰의 희생자가 되는 수많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때문에 스스로 분개했고 나 또한 미국인의 한 사람이었기에 라오스에서 어떤 취급을 받게될 것인지 무척 곤혹스러웠다.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을까? 아니면 그들은 미국이 그들의 땅에서 저지른 행적을 정당화 할 수 있는지 심문을 받게될까? 그들은 나를 경계하고 정부관리들은 나를 밀접하게 감시할 것인가? 혹은 친구로 받아들여질까?

   이러한 몇몇 질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을 비켜가게 했을 지 몰라도 나로서는 내가 이땅에 가고 싶어한 몇가지 주요이유들중의 하나였다. 지구상 최후의 공산주의국가들중의 하나인 이나라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꼬고 봐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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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라오스에 가고 싶어한 것은 확실했지만 NTA가 왜 나같은 사람을 뽑으려 한 것인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채 였다. 결국 나는 태국어와 비슷하긴 하지만 내가 존스홀에서 그렇게 오랬동안 배워왔던 일본어나 중국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인 라오스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리고 나 스스로는 자주 여행자이긴 했으나 여행업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비교적 잘 구사하는 영어능력과 그보다는 영 못하는 프랑스어와 확실한 교양교육뿐이었다. 내가 유명한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은 당연히 무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곧 발견한 사실이지만 라오스에서 그런 학교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도대체 공산주의 정권의 관광부서는 왜 나 같은 신출내기 미국인을 고용한 것일까?

   해답은 세계 10대빈국인 라오스의 경제상황에서 찾을 수 잇는 것이었다. 산업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경제는 유엔, 아시아개발은행이나 세계은행 그리고 개별 원조국들로부터 넘쳐들어오는 외국원조에 깜짝놀람정도로 의존적이다.1990년대의 아시아경제위기, 특히 태국의 통화폭락사태는 라오스 경제에 괴멸적 영향을 미쳐 라오스 공식통화인 킾을 끝모를 추락의 나락으로 내몰았다. 정부의 통제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오스에는 번창하는 불법외환시장이 존재하며 베트맘과 태국으로부토의 밀수도 성행한다. 2000년도에 라오스는 상당히 인상적인 4.5%의 경제성장을 보였으나 일인당국민총생산은 단 272달러에 그쳤다. 외국원조가 국가 총예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98년에 들어서서 라오스 정권의 책임자중 몇몇이 라오스 경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바로 관광이다. 경제자유화라는 대원칙의 일부로서 정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외국인의 자국방문을 허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1975년 이래 이 나라를 외부세계로부터 완전 고립시켜온 정권으로서는 중대한 정책전환을 의미했다. 개방결정후에 라오스의 관광업은 곧 바로 이륙했다. 1990년과 1997년 사이 입국 관광객숫자는 연율로 74%나 증가했다. 1990년에 단지 14,400명이 라오스를 찾은 데 비하여 1997년에 이숫자는 463,200명으로 늘어났다. NTA의 통계는 관광업이 벌어들인 외화는 불과 이년전의 2천4백만 달러에서 1997년에 7천3백만 달러로 늘어났다. 이미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십년 이상 외부세계에 접근금지였던 이 나라의 신비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스가 베트남이나 태국의 발달된 관광산업을 따라잡으려면 먼 길을 가야만 했다. 관광객 숫자는 늘어났지만 라오스의 동남부 주변국을 방문하는 숫자에 비하면 미약했다. 따라서 러오스 정부는 1999-2000년 시즌을 ‘라오스방문의 해‘로 지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NTA에 이 켐페인의 성공을 건 유력한 책임을 지웠다. 정부관리들이 관광업의 발전에 신명을 바치려 결정하긴 했지만 광관업이 결과적으로 라오스의 문화와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하여는 서로가 엇갈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당의 고위인사가 태국을 바라볼 때 그들 눈에는 관광객들로 들어찬 나라가 보일 뿐이었다. 라오스 정부는 전후 태국이 경험한 것과 같은 번창하는 섹스산업이나 과도한 난개발, 환경파괴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누구나와 마찬가지로10년전만해도 원시나 다름없던 곳이 지금은 너무나 붐비고 더러워져서 관광객들조차 그곳을 피하곤 하는 태국의 휴양지들을 잘 알고 있었다.몇몇 당 지도자들은 관광객들이 라오스 정치적, 사회적 안정에 미칠 영향을 깊이 의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업이란 마약을 찾으려 긴머리카락을 날리며 시골을 활보하는  히피들이나 자유와 민주주의같은 미친 사상을 퍼지르는 이미지와 결부되어 떠올랐다. (사실 그 이미지가 서실과 그리 다르지는 않다.) 외국인들의 유입은 당이 나라를 유지하고 연합시키려 하던 힘든 노역을 무력하게 만들도록 위협했다.

     NTA에서의 내동료들이 마주친 도전은 먼저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었던 심오한 문화적, 자연적 유산을 보존함과 동시에 나라는 나라대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도록 하는 관광산업을 개발하는 방법은 무었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끼어들었을까? 내가 판단하기로는 그들은 내가 대량의 유입 관광객을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기토 영어를 가르칠 것이었고 라오스에서 무었을 하고 무었을 볼 것인지에 대한 정보자료의 개발을 도울 것이었다. 또한 나는 적합한 종류의 관광객들을 유인할 만한 곳으로서의 라오스를 어떻게 광고할 것인지에 대해 그들과 손발을 맞출 것이었고, 무급 컨설턴트로서 이러 저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숙고하면서 향후 몇 십년간에 걸쳐 신중하게 고려된, 관광개발에 대한 건전한 접근에 기여할 몇몇 방법들을 시험해 볼 것이었다.

   NTA에서 할 일의 전망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라오스 정부 관리들을 괴롭히고 있던 관광에 대한 마찬가지의 여러 가지 걱정거리와도 싸워야만 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상당히 여행을 많이 했던 편이었고 관광객의 도래와 함께 완전히 변모해버린 곳에 가본적도 있었다. 관광객들은 스스로는 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역경제를 어지럽히고 지역사회에 불건전한 습관을 퍼뜨리거나 고대의 문화전통을 파괴하기 쉽다. 나 스스로도 그러한 영향을 미친 적이 있다. 성공적으로 할 수만 있다면 환경관광이나 문화관광과 같은 접근방법이 위협받는 자연자원이나 문화전통을 보호하는 데 인센티브를 만들어낼 잠재력이 있으며 동시에 사람들이 돈을  버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The General

장군


주인이 종자들을 귀히 여기듯

할아버지는 자손들을 소중히 여긴다.

라오스 속담.



브양티엔에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그들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라오스 정부를 일컫는 ‘홍칸 통티아오 헹사드’란 말은 끝없는 관료적 연결고리의 또 다른 한 고리인 것처럼 들렸다. 라오스 사람이건 외국인건 가릴 것 없이 브양티엔에서 첫 몇 개월간 만난 사람들은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와 브양티엔의 중앙통인 랜상로에 떨어진 것 같은 백색 콘크리트 건물이 내가 이하는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랜상로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에는 ‘프랑스 대로’라고 알려졌던 곳으로 심지어 지금도 NTA에 있던 사람들은 그 대로를 브양티엔의 샹젤리제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1998년에 처음 비행기에서 빠져 나왔을 때 브양티엔에 포장도로라곤 몇 되지도 않았지만- 심지어 제대로 된 영화관 하나도 없고- 라오스의 수도와 파리를 평행선에 놓고 보는 것이 완전히 잘못 된 것 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몇분 정도의 거리에 랜상로가 끝나는 지점에 에트왈을 닮은 로타리가 있고 그 한가운데 브양티엔판 개선문인 파투사이가 서있다. 승리의 문, 즉 파투사이는 공산당이 집권하기 전에 전쟁에서 죽은 라오인들을 기리기 위해 1969년에 건립되었다. 이 탑은 ‘수직활주로‘로도 알려져 있는 데 이유는 이 건축물이 미국이 당초 공항건설용으로 원조한 시멘트로 공사가 마무리된 때문이다. 프랑스적인 영감에도 불구하고 라오스 스타일의 소조에 불교적 이미지가 남아있고 아치들 밑의 벽화들은 라마야나의 장면들을 표상하고 있다.

    NTA에 인접하여 ‘탈랏 사오’,즉 아침시장이 있는데 고미술품 직물과 조각품에서 주방용품, 보석,비단에서 가전제품을 파는 개인소유 매대가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아침시장은 -나중에 더 자세한 사정을 알게될 때 까지- 처음 몇달간 주말마다 달러를 라오스 킾으로 환전하기 위해 들른 곳이다. 이 불법거래를 하기 위해서 나는 아침시장의 매대 한군데에 살짝 들어가서 카운터 뒤에 서 있곤 했다. 운이 좋으면 공범인 환전업자와 나는 시장을 순찰하는 굳은 인상을 한 경찰의 시선을 유유히 빠져 나오곤 했다. 깊의 가치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시장을 빠져 나올 때 마다 킾 다발은 계속적으로 늘어나곤했다.

    랜상로의 반대쪽 끝은 당초 프랑스총독관저로 건립되었던 라오스 대통령궁이 있었다. 프랑스는 1893년에 라오스를 점령했고 프랑스는 브양티엔의 ‘고위주차관‘을 통하여 라오스 전역을 직접 통치했다. 독립후에 ’시사방 봉’왕과, 나중에는 그의 아들 ‘시사방 바트나’는 루앙 프라방의 왕궁에서 브양티엔을 방문할 때 마다 이 관저를 행궁으로 사용했다. 이 곳은 지금은 외국귀빈의 숙소와 대통령실 각료회의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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