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고교철학 I
人間學. 哲學. 形而上學/앙드레 베르제즈, 드 니 위스망 共著
남기영 譯 /(주)삼협종합출판부. 2006.
제6장 죽음
1. 우주의 죽음
죽음은 생명이 있는 개체 특유의 것이 아니라 모든 폐쇄적 물리조직에 해당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것이다.
열은 뜨거운 물체에서 찬 물체로 이동하며 온도차가 완전히 없어질 때 까지 즉, 두 물체의 온도가 동등해 질 때까지 이동한다. 균등하지 않은 것에서 균등한 것으로, 운동에서 정지로, 타양성에서 통일로의 이행은 진화나 발전과는 반대된다. 이것은 일종의 ‘퇴화‘이며 공식용어로는 ’엔트로피‘라고 한다.
자크 그렌느발드
<우주의 열의 소멸원리는 간단하다 : 모든 에너지가 자연적으로 열로 변하고, 그 열의 강도가 자연적으로 낮게 강하된다면, 또 이 말은 세계의 에너지의 변환능력은 상실되기만 하고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 즉 방산을 의미한다면 , 그리고 만일 우주는 다른 세계와 에너지를 교환하지 않는 물리적으로 폐쇄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언제인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유한한 시간 내에 우주의 엔트로피는 최대치를 갖게 될 것이다. 즉, 우주의 생성은 정지될 것이다.>
2. 삶과 죽음
복잡한 의식을 향하여 발전하는 진화는 엔트로피와는 반대인 ‘반엔트로피’를 나타낸다. 우주의 역사, 즉 생명의 역사는 <성장하는 형성>의 역사이다. 이와 달리 물질세계의 엔트로피는 <탈형성의 법칙>이며 죽음의 법칙이다.
물질적 우주의 법칙이 죽음이라면, 생명이 있는 존재는 수수께끼이다.
죽음에 대한 두 개의 견해:
1) 생명은 엔트로피에서 예외가 되어야할 필요가 없다.
2) 우주의 죽음은 숙명인가?
결국 모든 유기체는 보다 무질서한 것으로 되어가며 , 우주 내에서는 죽음이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생명보다 우세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인가?
톰슨, 지구는<장래에, 유한한 시간 내에, 실제로 닥쳐올 어느 미래에, 인간이 거처할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다.>
3. 죽음에 대한 참된 문제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이란 ‘살아있는 것의 죽음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인간만이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며,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의 문제는 인간에게만 제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시체를 내 버린 적이 없다. 유해에 대한 모든 배려는 죽음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는 불멸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다.
4.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서의 철학
스피노자 < 철학자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참된 철학자는 긍정적인 사람이며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치고 < 자신의 존재를 굳게 지키는데>에 전념하는 사람이다.
플라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를 대립시킨다. 죽는 것은 육체뿐이고 영혼은 영원하다. 철학자는 육체를 경멸하기를 배우고 육체가 일시적이라는 것을 평온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존재의 철학의 전형’이다.
절대적인 행복은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행복이며, 이 행복은 사물의 본질과 지성적으로 일치하는 가운데 있다. 오류도 악도 죽음도 이러한 적극적인 사유를 조금이라도 탈취할 수가 없다. 존재에 비하면 이런 것들은 부재(absence), 결함(defect), 결여(Privation)일 뿐이다. 죽음을 사유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무를 사유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실체의 단순한 유한양태인 인간은 <바닷물이 역풍에 의해 파도치는 것처럼, 외적인 원인들의 압력을 받는다.> 인간의 자신의 존재의 확장을 의미하는 감정인 기쁨과 자신의 존재의 쇠퇴를 의미하는 감정인 슬픔사이에서 끊임없이 파동치고 있다.
무한한 실체는 한계가 없는 자연이며, 유한한 개체는 이 한계가 없는 자연의 지극히 적은 한 개의 조각일 뿐이다.
5. 철학은 죽음을 망각할 수 없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그러나 모든 우리의 사유의 버팀대는 연약한 우리 개인이다.
에피큐로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죽었을 때, < 실제의 죽음가운데서 살아서 자신의 상실을 한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는가!>
죽음에 대한 객관적 정의;
1966년까지; 호흡의 정지, 심장의 정지-> 뇌기능의 정지
삼인칭의 죽음은 비인칭의 죽음 (사람은 죽는다)이라는 개념적인 괴물이 아니라 비극적인 경험, 타자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
이인칭의 죽음은 누구와도 상관없는 아무나의 죽음이 아니라 내가 이인칭으로 말하던 사람, 내가 우정을 가지고 인정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이다.
가브리엘 마르셀 <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들의 죽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다.>
일인칭의 죽음은 과거형으로는 생각될 수 없고, 현재형으로는 명확하게 생각될 수 없지만 미래형으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을 위협하는 죽음은 막연하게 예감되는 공동의 운명으로서 나타나지 않고, 가장 개인적인 사건으로서, 유일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나에게 관련된 사건으로서, 근본적으로 나 혼자가 되어 대하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죽음이 매복해있는 젊은 사람은 <남이 모르는 노인>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 사람은 태어날 때에, 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늙었다.>
6. 철학: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
스토아 철학자들 특히 세네카는 자살가능성을 인간의 자유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마음대로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한다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된다. 샤르트르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어떤 경우에도 죽음은 내 자유의 모습일 수 없다.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일종의 착각 때문이다. 자살 그 자체의 결과는 모든 투영의 종말이며, 모든 가능성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생각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상호배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본다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바로 죽음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융(Jung) [숨겨진 현상]
삶을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성인이 될 것이다. 그 순간이 닥쳐와도 죽음을 가장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가장 충만하고 가장 행복한 실존을 향유한 사람들이다. 결국 우리는 유한한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시간이 조직 될 수 있기 때문에 삶에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페넬롱(Fenelon)
시간은 영원을 절약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시간을 남용한다면, 영원은 시간의 상실을 후회할 만큼 길지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색은 필요하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깨우쳐 준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의식은 타자를 위하여 또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일생을 이룩하라는 권유가 된다.
7. 자살: 죽음에 대한 본능
스피노자의 철학 가운데 죽음의 자리는 없다. 그는 외적인 힘이 의지를 독점하고 의지를 완전히 변질시켜 버렸기 때문에 자살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 자실이란 일종의 오해이며, 살려는 의지를 감금시켜 버린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 4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 자살이란 의지의 부정이 아니라, 살려는 의지의 강력한 긍정의 표시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살려는 의지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려는 의지의 노예가 된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재산, 명성,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자살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 불만이 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며, 인생에 불만이 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가 집착했던 것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다. 빠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 행복을 추구한다. 스스로 목을 매려는 사람까지도.>
자살은 희생과 비슷하다.
희생하는 사람의 목적은 어떤 가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런 경우 죽음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며 죽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만나는 것이다. 자살의 경우는 죽음이 목적이 되고 죽음 자체를 추구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자살에는 가치를 향한 목적이 있다. < ...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이라는.. 궁핍을 무서워한 사기꾼의 자살과 체포의 위험에서 자살한 군인의 죽음은 다른 것이다. 공통점은 죽음이 하나의 수단이 된 점이다.
프로이드 이후로 <죽음에의 본능>, <죽음에의 충동>이 무의식의 심층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이 있다.
프로이드는 1914-1918년의 처참한 전쟁을 경험하면서,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15년에 프로이드는 성적본능과 구별되는 가학적 파괴본능뿐만 아니라 자기 파괴의 충동을 말한다. 1920년에 죽음에 대한 충동을 소재로 한 논문 < 괘락원리의 피안>을 발표한다.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충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1) 외상성 신경장애에 의한 악몽
2) 불쾌한 사건의 반복
3) 환자들의 치료거부
프로이드에 의하면 꿈은 어느 정도 은폐된 방식으로 또 상징적인 방식으로 욕구충족을 표현한다. 꿈은 괘락원리의 표현이다.
<죽음의 본능에 대한 의심>
오토랑크에 의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 탄생의 충격에 의한 외상성 전신장애>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암암리에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랑크가 말하는 이전의 상태란 삶이 아닌 것이 아니라, 태아의 삶, 자궁내의 존재이다. 그러나 죽음의 충동은 이전의 상태를 원하는 퇴행의 성향을 넘어서 유기적인 것에서 무기적인 것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을 가정하는 것이다. 죽음에의 충동은 퇴행이 아니라 분해일 것이다. 유기체에게 자기 자신을 분해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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