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讀

럭키경성, 살림, 전봉관

eyetalker 2008. 6. 10.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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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樂喜)경성,살림,전봉관

부제= 근대 조선을 들썩인 투기열풍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난 가을부터 문화계, 영화계에 ‘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각종 작품들이 나돌았다. 아마 386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층이 식민지 시대의 향수(도발적이긴 하다만)에 어렴풋한 애정 같은 것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약간 음험한 구석도 없지 않으나, 기실,  25년쯤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한일합방기에 태어나 식민지 시대를 당연시 하며 유년,소년을 보내고, 광복, 여순,제주도, 이승만, 이기붕, 419, 육이오, 월남전, 10.26을 다 보시고 가셨던 걸 생각하면, 어린시절 그 무릎 팍에 머리를 놓고 할아버지 듣던 내쇼날 진공관 라디오 뉴스나 드라마를 생각하면 30년대 식민지 시대가 그리 먼 것도 사실은 아닌 것이다. 안 그런가? 아마도 이것이 상술의 대상이 된 배경인 듯도.

 

럭키경성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사회의 활력(?), 물론 통제된 사회에서의 제한적 그것이긴 하지만,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회풍경이 지금의 조선사회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기도 하고, 역시 민족적 기질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통감한다. 일본적, 중국적, 러시아적 기질을 생각해보라. 불과 75년 전의 이야기에 지나지도 않는다. 그 중 나쁜 축에 속하는 Rat性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만연하고 있다.

 

북조선 동해안 북쪽 끝, 나진 항이 있다. 청진 항보다 조금 더 위. 지금 북한땅을 자유로 드나들 수 없는 걸 생각하면 식민지 시대 백성들의 행동, 사고반경은 지금 남조선 인민들보다 더 넓다. 특히 남,북만주, 북경, 상해, 몽고까지 드나든 것을 생각하면 더. 일제 만철을 타고 다닌 것이 한계이긴하다.  당시 함경북도 토지왕 김기덕이 나진항을 군항, 산업항으로 개발하려는 식민지 총독부, 일제의 계획을 미리 알고 엄청난 토지 투기를 해서 떼돈을 번 사연, 전 조선이 나진지역 토지매입에 들썩인 사건을 소상히 다루고 있다. 치부 수단으로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은 결국 이 땅의 땅부자들의 피에는 누적된 성공경험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거부들은 땅에 집착한다. 예전보다는 덜하긴 하다만. 화장으로, 이제는 묻힐 땅 한 평조차도 필수사항은 아닌데. 그 목적은 더 비싸게 팔아먹기 위함일 뿐.

 

미두시장의 이야기는 비교적 선진적이다. 투기이긴 하지만 그 존재이유와 가치가 있다. 상품시장에서 투기는 당연지사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선진금융기법이었을 것이다. 돈과 신여성과 축첩,매관매직등 당대의 관념과 어우러진 인생드라마다. 지금과도 그리 달라 뵈지는 않는다.

 

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의 주도인물 김기진의 이중생활은 흥미진진하다. 1903년생 김기진. 일본유학, 신문기자생활을 전전하다, 돈에 궁한 식민지 룸펜으로 살기보다 주식시장, 정어리기름을 위한 수산업, 금을 캐기위해 금광업까지 벌이다 모두 말아먹고 만다.

 

P 86 김기진이 주식투기에 열을 올리던 1930년대 후반은 부침이 심한 시대였다.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파장은 고스란히 주가에 반영되었다. 시시각각 타전되는 전황에 따라 주가는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 주가는 장졔스가 하야한다는 소식에 폭등했고, 국가 총동원령이 발동된다는 소식에 폭락했다. 중국군의 반격소식에 폭락했고, 일본군의 광동성 점령소식에 폭등했다.

 

P103 김기진은 거친 풍랑에 맞서 정어리를 좇고 있던 동안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일련의 비평을 쏟아내며 박영희, 임화 등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대중화 논쟁이라고 부르는 이 논쟁에서 김기진은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은 이념적 경직성에서 벗어나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885년생 울산생 이종만의 이야기는 식민지 시대의 최대의 드라마라고 해도 진부하지 않을 것 같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세상을 나선 시골양반은 2829기의 도전 끝에 인생을 성공한다. 그의 마지막 성공은(개인적일) 자본가로서는 유일하게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힌 사실일 수도 있다. 

 

P 173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은 1943년 대동콘체른은 차례로 붕괴했다….1944년 대동공업전문학교는 평남도청에 인수되어 공립으로 전환했다학교는 광복후 평양공대, 김일성종합대학 공락부를 거쳐 김책공업대학으로 이어졌다.

 

 

P 174 분단 이듬해, 1949 6월 김일성이 평양에서 소집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조선산업건설협회 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주석단에 자리한 김일성은 참가자들을 둘러보며 이 종만을 찾았다. 김일성은 단 아래를 향해 외쳤다. “남조선에서 올라온 대표들 가운데 이종만 선생이 오셨으면 주석단으로 올라오십시오.”

 

P179  그는 28번쓰러지고 29번 일어나면서도 기필코 사업에 성공해 소작인에게 토지를, 광부에게 광산을 돌려주려 했고, 일하는 사람이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구현하려 했다.

 

 

오산학교 창립자, 남강 이승훈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  유기 그릇 등짐지고 산길, 들길을 걸으며 장사에 몰입하던 보부상 이승훈. 그가 우연히 도산 안 창호의 연설을 듣고, 인생 길을 완전히 바꿔 민족지도자로 굳건히 서기까지. 아무리 드라마라해도 이런 드라마가 있을 수는 없다.

 

P 186  “… 일본인들은 장차 우리 이천만의 피를 빨아먹고야 말 것입니다우리 조상들이 전해준 유산은 일본인들이 가져갈 것이고, 우리 사랑하는 아들 딸들은 일본의 종으로 붙잡혀 갈 것입니다.” 1907년 봄, 평양 모란봉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30초반의 젊은 연사가 열변을 토했다. 연사의 누에는 눈물이 고였다. 구름같이 모인 청중도 하나 둘씩 흐느껴 울었다. 곡소리는 순식간에 모란봉을 뒤덮었다연사가 강연을 마치고 단위에서 내려오자 갓쓰고 도포입은 40중반의 중년남자가 달려와 연사의 손을 굳게 잡았다중년 남자는 상투를 풀고 머리를 깍았다. 즐기던 담배와 술도 끊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미로 이름도 이승일에서 이승훈으로 개명했다. 승일을 감동시킨 젊은 연사는 미국생활을 마치고 갓 귀국한 도산 안창호였다.

P.191 이승일은 1864년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이승일의 형 이승익의 현손인 국사학자 이기백 박사는 집안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남강 이승훈은 평안도 상놈출신이었다….태어난지 여덞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그는 부친에게서 세가지를 상속받았다. 첫째가 업신여김이었고 둘째가 가난이었으며, 셋째가 무식이었다이승일은 맨 몸으로 걷기도 힘든 산길을 지게에 무거운 놋그릇을 가득 짊어지고 , 발바닥이 터지고 갈라지도록 걸었다. 장맛비에 옷이 젖어 사타구니가 쓸리고, 촉설에 허벅지까지 눈이 차오를때에도 그는 어둠을 헤치고 걷고 또 걸었다. 오줌발도 얼어붙는 평안도 추위를 이기려고 때로는 비상조각을 떼어물고 걷기도 했다.

 

P 207 마흔 여덞에 무관학교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마흔 아홉살에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105인사건)에 연루돼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쉰여섯에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해 3년간 수감되었고  1930 53일 이승훈은 동상을 봉정받았고, 제막식이 끝난 후 닷새만에 예순일곱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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