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21세기, 김용옥, 통나무 1999년
1974년 출토된 馬王堆帛書 와 1993년 출토된 郭店竹簡의 내용까지를 모두 반영한, 김용옥의 老子(Laotsu) 道德經해설.
지나치게 입으로 그 玄學을 일삼는 者들과 달리 김용옥은 읽어보면 이해가 무척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읽어서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만 일삼으면 독자는 대체 어디서 의미를 구하란 말인가? 세상이 가장 싫어하는 바는 내 면전에서 버젓이 자기자랑을 일삼는 일이다.
老子를 이야기하면 문득 누군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을 이야기 하는데 나는 솔직히 그 뜻을 모르겠다. 어쩔수 없이 교수들의 설명을 들어야 하는 데 그 또한 속이 시원한 것은 아니다. 아마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뜻이 다 이런 것인가 보다.
다음의 사전에서 본 老子의 일생에 대한 설명;
생애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曲仁里: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周:BC 1111경~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그는 BC600년 경 周 나라에 살던 사람이다. 2600년 전에 태아나 살다 죽은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이 쓴 도덕경을 근 600여년이 지난 후, 서기 226년에 태어난 魏나라의 王弼이라는 사람이 그의 나이 16세때 주석을 달았다. (p93) 후대는 여기에 근거하여 도덕경을 사고하고 있다. 다시 1800년이 지난 후, 한국의 도올이 여기에 더하여 1974년, 1993년 중국에서 고시대 썩디 썩은 고분에서 출토된 천에 씌여진 도덕경, 대나무껍질에 적힌 죽간의 내용을 더하여 노자의 眞意를 전달하려하고 있는 중이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말도 안될 만큼 오래되고 오래된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바, 이 정도라면 이솝우화 듣는 정도에 그쳐야 틀림이 없을 듯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그 당시의 老子라는 사람이 살던 환경을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半原始에 다름 아니라고 봐야한다. 해가 한번 뜨면 눈이 부셔서 눈이 절로 잠길 정도로 강렬했을 것이다. 달은 그야말로 휘황찬란, 설악산 가는 새벽길에 헤드랜턴이 따로 필요 있었을까? 별은 손에 잡힐 듯이 머리 위를 진짜 강물처럼 흘러간다 銀河水다. 새와 동물들은 무시로 집 주위를 나뒹굴며 나 잡아드슈 하는 농을 떨었을 것 같다. 밤중, 새벽에는 앞, 뒷산 에서 여우나 늑대무리가 달에 사는 토끼를 꼬시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 이런 시대, 자연과 동식물과 물과불과 인간이 너나 없이 살던 시절에 노자라는 늙은이가 붓을 들고, 아니 붓은 없었을 것이고, 죽간이나 아니면 말린 돼지껍질 거죽 같은 곳에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고 끄적이기 시작했다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보면 노자는 만화책처럼 읽기 쉬울 책이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뭐 이런 거- 왕필과 그 후대의 먹물들이 이것을 보고 옳다거니 하고, 어렵게 어렵게 역고 풀어서 해쳐먹은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수라는 작자들이 또 이렇게해서 “벌어먹고” 있는 것이다. 나쁜 뜻이 아니다. 그것이 세상이고, 노자는 그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자는 이들을 먹여 살리는 “다단계판매회사 道德經“의 창업자, CEO다. 素女經보다야 낫지 뭐! 라면서 수염을 쓰다듬는 老子. 참고로 素女經의 목차는 이렇다.
1. : 방중술의 극치와 양 ․ 음기 증진 ──── [至理/養陽/養陰]
2. : 정신적 결합 및 전희 ───────── [和志/臨御]
3. : 남성의 절도 여성의 성적욕망 ───── [五常/五徵/五欲/十動/四至/九氣]
4. : 아홉 기본체위와 서른 가지 성적 기교 ─ [九法/三十法/九狀/六勢]
5. : 이로운 여덟 체위와 성적 능력 회복 ── [八益/七損]
6. : 방중비법에 따른 예방과 치유 ───── [還精/施寫/治傷/禁忌/斷鬼交]
7. : 여자의 선택 및 수태법 ──────── [求子/好女/惡女]
8. : 양생을 위한 강장 처방 ──────── [用藥石]
9. : 비 정상적 성기 치료 ───────── [玉莖小/玉門大/小女痛/長婦傷]
“2장의 내용이 가장 의미가 있을 듯하다” 정신적 결합, 곧, 和志다. 럿셀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는 부분인데. 럿셀도 소녀경에서 크게 감화를 받았던 듯. 나머지는 개나 소나 다 아는 내용일 듯. 내말은 소녀경이나 도덕경이나 무슨 대차가 있으리오 하는 것이다.
老子와 21세기- 책 내용은 이렇다.
上卷
p.98
지혜란 우리 삶의 과정적 행위로서의 지혜이다. 그런데 지혜의 특징은 권위적 실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따라서 老子는 미리 공부할 필요가 없다...노자는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 그냥 부담없이 정직하게 느끼는 책이 되어야.. 무엇을 구하려 하지 말 것이며..무엇을 배우려 하지 말 것이다... 빈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곧바로 나이 삶의 바른 가치의 한 측면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p128
有無, 長短, 高下, 音聲, 前後 바로 이러한 이가적 상대성이 곧 우리 언어의 본질이다. 언어는 이가적분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멸 이후의 사태는 실상의 여실한 표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적 언어만이 실상에 접근하는 인간의 유일한 통로라는데 인간존재의 파라독스가 있는 것이다. 언어는 끊임없이 유동적인 존재를 고착시킨다. 可道之道는 항상 그러한 도 (常道)가 아닌 것이다. 長과 短은 단지 상교되는데서만 발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가변적인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長 은 長으로서만 자기동일성을 주장하고, 短 은 短으로서만 자기동일성을 주장한다. 이것이 곧 언어의 비극인 것이다.
p136 生而不有
生하되 生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후대의 모든 無所有를 말하는 불교적 사유가 바로 이 생이불유적인 노자사상의 틀 속에서 전개된 것이다. 생하되 생한 결과를 내가 소유하지 않을 때, 당연히 지배나 권위나 모든 고착적 가치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즉, 생은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임으로 그 과정의 한 시점이 소유되는 순간에 生 그 자체가 멈추게 되는 것이다.
p148-149
우리가 살았던 20세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했던 적은 없다. 자본주의만 있었고, 자본주의의 존재양식의 다양한 한 방편의 형태로서 공산주의라는 경제체재가 존재했을 뿐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연이다... 노자는 바본주의를 “인간의 욕망을 자극시키는 재롸의 유통”이라고 규정한다. 노자는 여기서 분명히 “貨”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下卷
p45
노자가 道를 말할 때, 가장 우리 가슴에 쉽개 와닿는 이미자가 바로 물이다.... 물이 자신을 낮춘다함은 자신을 卑下시킬 줄 안다는 것이다...處衆人之所惡.. 물의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不爭 이다. Denial of Competition. 물은 자신을 낮추며 흐른다. 그러다 암석을 만나도 암석과 다투지 않고...다음 물의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水善利萬物
p77
도대체 인간으로부터의 피드백이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神 이라는 것, 道라는 것은 도무지 허깨비에 불과 한 것이다.
p82
종교의 제식은 청수 한그릇으로 족하니라
p121
살통이 30개의 살을 능히 통일할 수 있는 것은 그 빔 때문이다. 그 빔으로써 사물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능히 적음으로써 많음을 通御할 수 있는 것이다... 無=虛=用 없음은 빔이요 빔은 곧 있음의 쓰임이다.
p136
淮南子의 人間訓에서
夫禍之來也, 人自生之; 福之來也, 人自成之. 禍與福同門.
화와 복은 본 시 한 문의 다른 이름일 뿐
p248
無欲의 실제적 의미는 少寡(줄인다)의 역동적.항상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욕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항상 사를 줄이고 욕을 적게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p283
24장
企者不立, 跨者不行
발꿈치를 들고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아니하고
스스로 옳다하는 자는 빛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만하는 자는 으뜸이 될 수 없다
이것들은 도에 있어서는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한다
만물은 이런 것을 혐오한다
그러므로 도를 체득한 자는 처하지 아니하리니
저자가 지쳤던 모양인지, 별다른 長廣舌없이 하권의 끝은 후다닥 끝나고 있다.
2014년7월 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