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讀

전쟁의 발견. 이희진

eyetalker 2007. 1. 3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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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견-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위하여 ”

이희진, 2004년 9월, 출판사 “동아시아”


한국 고대사의 앞마당에서 벌어진 유의미한 몇몇 전장의 전과 후를 재해석해보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저작이다.


百濟 聖王을 아세요?


서기 462년, 일본가는 배를 탄 백제 개로왕의 희빈이 선상에서 산통을 겪다 일본 규슈 연안 ‘각라도‘에서 사내아이를 순산한다. 곧, 사마왕 백제 무령왕이다. 그의 아들이 바로 백제의 26대 왕 “聖王”이다. 523년 무령왕이 죽고, 뒤이어 백제의 왕위에 오른다.  삼국사기 권제26. 백제본기 제4편이다.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에서 1958년에 펴낸 삼국사기 복사본을 뒤적이고 있다.)


“이름은 명농이니 무령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조 기사에서는 이 분을 “聖明王“이라 부른다. 알다시피 일본서기 흠명천황조는 백제본기의 내용을 엄청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상당부분 조작되어버린 “일본서기” 이지만... 아마도 당시 일본의 황족, 귀족이 百濟를 영원의 모국으로 생각하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모국이 망하였으니 그를 망하게 한 신라, 나아가 반도에 대한 적개심은 오죽할까. 뿌리가 깊은 정도가 아니라 철천지 원쑤가 된 것이다.)


554년 지금의 충북 옥천 군서, 즉 管山城에서 백제와 신라가 큰 싸움을 벌인다.

진흥왕 15년,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급습, 점령하자 이에 대항하고자 성왕은 대가야, 왜와 연합하여 관산을 치게 되 것. 이 전투에서 총3만의 군사를 잃은 백제는 쇠퇴의 길로, 큰 공을 세운 김 무력(김 유신의 할아버지)은 신라의 발흥을 주도하게 되어간다는 것이 역사적 통설이다.


저자는 이 전투가 백제의 참패로 끝난 것은 ‘우연‘한 사건의 결과로 주장하고 있다. 나도 이부분에서 솔깃한 흥미를 느끼며 읽어 나가다 그 우연이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알고 눈가가 젖어버리는 참담을 맛보았다.


다음은 이 우연한 사건에 관한 몇 가지 출처가 다른 기사들의 나열.


-다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


백제왕 ‘명농(明襛)’이 가양(加良) 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의 군주 김 무력(金武力)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지금의 보은)의 고간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9천6백 명을 목 베었고 말 한 마리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32년조]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더니 신라의 복병이 튀어나오므로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聖” 이라 하였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조]


... 여창(餘昌) (백제 성왕의 아들, 나중에 위덕왕)이 신라 정벌을 계획하자 ‘기로‘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그 아버지 明王(聖王)은 여창이 오랬동안 행군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 사마노(飼馬奴= 말먹이 주는 머슴) 고도(苦都 또는 谷智)에게 “ 고도는 천한 노(예)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예)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 합니다”라고 청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예)에게 줄 수 없다”하니 ......고도는 머리를 베어 명왕을 죽이고 구덩이에 파 묻었다...


여창은 포위 당하자 빠져나오려 했으나 빠져 나올 수 없었으나... 겨우 샛길로 빠져나와 도망하여 돌아왔다...


-끝-


저자는 여러 정황상, 백제군이 “관산성”을 이미 함락시킨 후, 승전보를 들은 성왕이 좌평 4명과 겨우 50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관산성에 거의 도달한 시점에 “우연”히도, 공격받는 신라 “관산성”을 지원하고자 남하해온 김 무력(김 유신의 조부) 휘하부대의 매복에 걸려 어이없는 참살을 당한 것으로 본다.


聖王의 넋에 맑은 술 한잔을 올리고자 소주 두병을 샀다.

반병 나마를 자기 잔에 담아 마셨다.


ㅈㅣㄴ 

(부기)

‘일본서기‘에 신라군이, 그 생포한 “백제 성왕”을 능멸한다는 기사는 독자로 하여금 新羅에 대한 敵意를 고양하고자 하는  일본서기 편찬자의 ’프로퍼간다’적 성격이 짙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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