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讀

고대왕국의 풍경. 이근우

eyetalker 2007. 2. 1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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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왕국의 풍경, 그리고 새로운 시선.

이 근우 지음, 2006.11.27 인물과 사상사 刊.


부경대 사학과 부교수로 있는 이 근우 씨의 ‘고대사‘를 보는 색다른 시선의 모음집이다.


2007년 봄이다. 입춘이 지났고 氣象도 溫和하다. 시내에 나갔다. 종로거리를 걷다동아일보 구옥을 지나,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질러 서울시립역사박물관에 들어갔다. 애초 고구려시대에 석판에 새겼다 전란중에 대동강에 빠져버렸다는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방성’도 같은 천문도를 전시하고 있다. 밤하늘을 별을 세필로 촘촘히 그 이름을 적어두고, 은하수까지도 마치 한강수 물 흐르듯 정성스럽게 그려놓고 있다. 가만히 치어다보고 있으면 ‘북극성, 북두칠성, 남두육성, 견우성, 직녀성’같은 별들이 깨알 같은 전구를 통하여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이 꼭 야외의 산마루에 누워 별밤을 올려다보는 듯한 아득함을 안겨준다.

최정상은 물론, 북두칠성, 그 앞에는 북극오성이다.

증간쯤에 있는 별세개는 아마도 직녀성, 은하수가 그 사이를 지나고 그 왼쪽밑은 견우성.

견우 앞에는 아마도 남두육성. 

 


그렇고.. 최근에 읽은 고대사 관련 서적들은 새로운 시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점이 신선하다. ‘전쟁의 발견’도 그랬고. 공통적으로 ‘상상력‘의 필요를 강조하고 있는 데, 事記, 書紀류의 축자적 해석만으로는 더 이상 오갈 데 없고, 사료 자체에 작위적 손질의 흔적이 역력한 경우, 결국 그 이면해석의 정확성, 합리성은 연구자 개개의 ’사고반경’의 크기에 좌우될 수 밖 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단정적일 수 없는 부분은 다양한 가능성의 존재를 밝히고 독자의 이해를 구하면 될 것이고 우연이 지배한 사건의 경우에도 전후관계의 소상한 설명을 통하면 저자와 역자는 어느순간 무심결에 ‘相通’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想像力’에 동의한다. ‘이메지나티브‘다.


다음은 개략적 시선의 모음


물론 소제목은 나의 ‘상상력‘이다.


1. 불교와 기독교는 심령적 착취도구로 기능했다(한다).

 

“王卽佛”사상 과 기독교가 요구하는 ‘극락정토’=‘영생’에 대한 믿음은 결국 현세의 고통은 어떤 연유로든 ‘땅란~더’이고 ‘시키는 대로’ 참고 지내면 ‘성불’하는 것이니 '이르는 대로 사시오'라는 것과 다름없지 않는가?


2. 삼국은 원래 다른 종족.


북방기마족, 남방농경족은 당시의 지리적 거리에 비추어 봐도 달라도 한참 다른 족속들이고 말(言語)이고 문화고 같을 이유가 없다. 애초에 별종들이었고 서로를 오랑캐로 비천시 하다 수천년 세월을 통해 동화되고 동질화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울 따름.


3. ‘삼국통일’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 Unintended consequence?

p.73 

(삼국사기)

642년8월, 백제장군 ‘윤충‘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等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 전투를 보복하려하여,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듣고 기둥에 기대어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못하였다. 한참이 지나 “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적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 딸“.


신라의 골품제도상 ‘眞骨’로서의 춘추는 왕이 될 수 없었으나, 결국에는 ‘태종무열왕’이 되고 삼국통일의 기념비적 역사를 시작한 제왕으로 역사에 남았다. 그 대업은 아들 '문무왕'이 이루었으나. 


그의 백제멸망에 대한 강한 집념은 ‘딸, 고타랑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서 발로된 것으로 그것이 결국은 삼국통일로 연결되어진 것은 어쩌면 우연이다. 


백제함락후, 당은 다시 북방으로부터 고구려를 치고, 신라에 대하여도 후방에서 고구려를 치라고 종용하지만 김유신과 김춘추의 신라조정은 그에 그다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연개소문이후 그의 세 아들 간 내분으로 인한 자중지란으로 멸망하게 되고, 결국 통일된 한반도의 북방 대부분은 ‘당’의 차지가 되어버린다. 당은 백제지역에 “熊津都督府”를, 고구려 땅에는 “安東都護府”를 설치한다. 이어 벌어진 7년간의 나당전쟁은 경기도 연천 매소성 전투를 끝으로 20만 당 주둔군의 패퇴, 철군으로 막을 내린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도 우리가 오합지졸을 칭할 때 ‘당나라 군대’라며 멸시하는 발언은 아마도 신라군의 대당항쟁의 경험에서 나와 각인된 민족적 프라이드 또는 프로퍼간다일지도 모르겠다.

  

의자왕이 대야성을 함락시키되, “춘추의 딸”을 경주로 돌려보내기만 했어도.      사비성 함락후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 장안까지 끌려가 이국 땅에서 죽어갔다.


4. 일본의 지명= 고대 가야의 행정 지명


일본의 “郡山” = 코후리 야마 = 코후리= 고을

寸= 무라= 모라= 마을


5. 백제는 왜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칠지도를 주고 받은 이유는 쌍방의 존재를 필요로 한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기인한다. 고구려에 항시 위협을 받아온 백제로서는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그 대상은 이전부터 친밀한 교류관계를 맺어온 ‘왜’일 수 밖에 없었다.


6. 백제가 문화적 선진국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백제가 왜에 파견한 오경박사, 역박사는 사실 백제인이 아니라 양나라 학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무령왕령 고분의 축조양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구운 벽돌이나 엽전, 진묘수의 존재로 볼 때, 양나라 기술자들이 축조해준 것일 수도 있다.


등등.


‘我田引水’식 해석을 피하기 위한, 고대사의 각종 사건들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


ㅈㅣ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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