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영광. 그레이엄 그린.
그린은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일까? 아직도 의미가 정확히 잡히지 않아 불안하기까지 한 심정이다. 시속 270키로의 KTX, 부산에 도착하여 갈아탄 지하철에서, 심한 향내 미만한 심야의 지하 영안실 구석에서, 새벽길을 돌아와 앉은 책상 구석에 두고 읽어낸 소설이 아리송 하기만 하다니. ( 그 분을 만날 때조차 가방속의 소설에 반쯤 신경을 쏟고 있었는데..)
멕시코, 그리고 환상처럼 언급되는 ‘베라크루즈’. 도데체 ‘베라크루즈‘는 뭐하는 동네야?. ’거미연인의 키스‘, 현대자동차의 신형 SUV도 베라크루즈.
멕시코 타바스코는 무신론 공산주의 혁명분자에 의해 탈취, 통치된다. 카톨릭과 술은 (카톨릭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 신부들은 필경 보다 쎈 술을 즐기는 부류들로 구성되어있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긴하다..) 금지되고 사제들은 쫓기는 개 신세가 된다. 잡히면 구타당한 후 살해되어야할 검은 사악이다. 경위는 주민들을 협박하여 신부를 추격한다. 종교를 팔아 민중을 착취하는 구체제의 약탈자들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찬, 체제의 도덕성을 굳건히 신봉하는 ‘경위’를 제외하고, 당구에 심취한 서장을 비롯- 이 사람으로 아마 라틴 아메리카의 느긋한 건달문화를 표상하려 한듯하다- 썩은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일주하는 젊은 날의 체 게바라의 로망같은, 주변부 인물들 대부분은 우리네 세상에서, 또 자신으로부터 발견되는 존재들의 표상. 무관심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무기력하고, 좌절된 민초들의 까마귀떼 군집.
늙고, 둔중한, ‘호세‘신부는 체제에 의해 강제 환속, 결혼강요 당한다. 세속의 조롱거리, 배교에 내몰린 정체성의 완벽한 파괴, 끝 모를 자기연민, 현실도피. 젊었던 시절 관할교구의 마리아와 단5분간의 정사로 사생아를 가진 ’위스키‘ 신부- 소설의 화자-는 도피, 육체적 고통, 극도의 심적부하를 견디며 성숙의 자세, 겸손을 체득하게 된다. (사제로서 마땅히 그랬어야하나 기실은 완벽히 결핍되었던 미덕.)
항구도시에서 배를 기다리며 탈주를 도모하던 ‘낯선남자’- 위스키 신부-가 죽어가는 엄마를 위해 세례를 부탁하는(아마도) 소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소년의 청을 거절하고 배를 타고 떠났다면 그의 인간적 성숙, 삶에 대한 겸허의 자각을 이룰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배를 포기하고 소년을 따라감으로서 이후 그가 감내해야하는 육체적, 심적 고난, 그리고 총살은 신부로서, 종교적 승리를 얻기 위해 - 소설 제목중의 ‘영광’에 해당한다- 치러야 했던 ‘댓가‘ (즉, ’권력의 포기와 부정‘에 해당한다.) 일까.
대지주와 소작농의 관계, 착취당하는 민중으로서의 토착인디언의 삶에 대한 연민에 더하여 자본주의적 착취에 저항하는 해방신학의 논의로까지 소설을 이끌고 갔다가는 그린은 개 박살이 났을 수도 있다.. (문학에 무슨 힘이 있겠소.) 소설에서 그들은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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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리필딩의 ‘톰 존스‘가 한국어로 초번역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소설들이 이제야 번역되었다니. 찔끔 놀라게 된다. 저저번주 토요일인가, EBS에서 조지프 콘라드의 소설 ’로드 짐’을 영화화 한 ‘로드 짐’을 보았다. 영문학은 이제야 곳곳에서 승리하고 있다. (후후..또 개소리).
새로운 벚꽃의 시절이다. 당신에게 죠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권한다. 보인다. ‘황사’에 휩쓸려 날아갈 속절없는 흰 벚꽃의 흩날림. 당신 발 걸음앞에 혹 한 이파리 떨어지면 그 책 사이 끼워두고 어디 아늑한 곳에 들어앉아 화이트 와인이라도 같이 마실까?.
삼랑진 근처를 지나다 언제나 내 편인 夕陽 속의 江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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