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성과 우리인문학의 글쓰기. 김영민. 민음사. 1996년
(읽어나가면서 주요 맥락을 있는 그대로 옮겨 공부 삼는다.)
‣서문: 우리 인문학의 길없는 길
p.5
‘인식과 해석을 넘어 성숙과 해방의 지경을 개척하는 것‘은 근년의 지속적 관심사..
p.6
',, 이 시대의 식민성문제란 과거의 중국이나 일본, 현재의 구라파나 미국이라는 나라들과의 종속적 대외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중요한 것은 오히려 이미 그 종속성이 우리 자신의 삶과 앎을 서로 소외시키고, 속으로부터 우리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내면의 문제로 체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논문중심주의와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p.14
자신을 학자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원하든 원치않든 논문이라는 특정한 글쓰기의 형태를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고, 그의 양과 질에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논문은 그의 정신적 삶을 집약적으로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p.16
논문의 독재와 폐해로부터 학자들을 해방시키는 계기를 찾는 것이 취지가 될 것이다....우리는 논문이 학자들의 생존수단인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철학과는 내가 들어갔지만...잘라말해서 그것은 서구 정신문화의 정화로서 수입된 상품이며, 이 땅이 서구문화의 중개상 노릇을 멈추지 않는 한....
p17
우리의 학문적 풍토가 어떤 식이든, 어느 정도든 서구에 예속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 [논문중심주의]야 말로 그 예속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자 또한 가장 분명한 증좌일 것.... 논문은 표현과 전달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학문성]이라는 우리의 생명력을 독점함으로써 우리의 생존을 좌우하는 독재자이다. 이미 우리의 학문은 논문에게 바치는 연중 제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p.18
이 맹목은 논문만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글쓰기이며, 오직 논문을 통해서만 학문성이 보장된다는 지적허위의식을 조장해 왔던 것이다..... 논문중심주의의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학자들은 논문을 글쓰기의 유일무이한 원형으로 보고, 특히 시적표현이나 이야기식의 즉물적인 묘사에 타성적인 거부감을 거두지 않는다.
p.19
논문이란 형식성의 체계이다. 따라서 논문중심주의란 형식숭배주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와 인식, 나아가서는 언어의 기본단위를 동사보다는 명사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를 [명사주의]라고 불러본다면 논문의 형식숭배주의도 일종의 명사주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p.21
이 글을 논문 폐기론 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논문이 서구의 정신문화적 역사가운데서 스스로의 의미를 찾았고, 그 이름에 값한 가치를 증명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문제는 지금 이 땅에서 학문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땅의 특수성과 이 시대의 보편성을 아울러 살릴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실정은 서구의 논문중심주의에 매몰된 채 글쓰기에 대한 자생적 반성조차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원전중심주의와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p.38
흔히 旣知와 未知는 공정한 경쟁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 미지를 대하는 기지는 흔히 기득권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화한다면 메시지의 주위에는 힘이 넘쳐나고 있고, 텍스트의 이면에는 컨텍스트가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p39
인문학의 글쓰기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논문이라는 형식성도 서구 추수적이었고 무분별했던 근대화의 와중에서 힘의 편중으로 말미암은 사고의 경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진위나 적부의 잣대보다는 힘의 역학에 시선을 모으는 태도는 이글과 이글을 둘러싼 사유의 패턴이므로 독자들의 주목을 요한다.
p.47
고착과 퇴행으로서의 원전중심주의를 완전히 극복하는 길은 결국 事大와 追隨의 불행한 역사를 뒤엎는 수밖에 없지만 이는 불가능한 공상에 머물 뿐이다. 우선 필요한 일은 줏대있는 지식인을 키우는 것이다. 영리한 전문가 보다는 창발적 용기와 그 바탕이 될 자긍심에 벅찬 학인들을 생산해 내는 일이다. 원전들과 큰 이름들 그리고 거대이론의 그림자속에 숨어 권위를 도용하는 전문인 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알고 그 목소리를 공정한 경쟁 관계 속에서 놀려볼 줄 아는 실험인의 등장을 권려하는 일이다.
p.51
원전중심주의는 학인들의 글쓰기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타율적 귀소의식이며 몇몇 세력있는 책들을 임의로 논의의 프로크루테스 침대로 삼는 폭력이며, 학인들의 자율적 비판의식은 저당잡힌 채 집단무의식적으로 섬기는 기둥서방이며, 삿된 눈치보기로 글쓰는 방식과 이에 공조하는 온갖 압력이다.
p.53
원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중심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착화, 우상화, 박제화된 중심을 제 모습으로 다시 살려 놓자는 주장이다. 삶의 복잡성과 역동성에 따르고 중심의 다양성과 가변성을 인정하자는 주장일 뿐이다.
‣기지촌의 지식인들
-탈식민성과 우리학문의 자생성
복거일 작 “캐프 세네카의 기지촌”(문학과 지성사,1994)를 가지고 여전히 ‘기지촌을 벗어나지 못한’채인 이 땅의 지식인들, 그 허위의식을 질타.
P. 64 .. 남의 말과 남의 글..
P. 67 .. 기지촌의 지식인들은 기지촌의 단맛을 깊숙이 알고 있는 자들이다.
P. 97 ..단언컨대 줏대를 새우기전에는 세게화란 어불성설일 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화란 집을 나산다는 뜻인데, 잡을 나서는 놈이 제 자신부터 먕확히 해두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을 만나서 제 집의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집짓기,글쓰기, 마음쓰기
-탈식민성의 걸음걸음
p.116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용인하는 배금의 상혼, 아무 구석이나 병풍세우고 아무벽이나 족자거는 졸부의 취향, 수입된 이론으로 본문을 채우고 수입된 원전과 이름들로 주를 채워야 행세할 수 있는 글쓰기...
‣글쓰기, 복잡성, 一理
-하얀전쟁과 이방인
1.글쓰기와 상상력
p.119
삶과 역사의 진면목은 실로 <그 환원할 수 없는 복잡성>에서 발견된다. 우리 삶의 구체적 실상은 잡스러울 정도로 복잡다양하며, 그래서 괴테의 흔한 인용구처럼, 과연 <개별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한다.>
2.구체와 추상, 혹은 <붙어있음>과 <떼어냄>
p.122
붙어있는 구체성과 떼어낸 추상성 사이의 긴장과 그 역학은 상기한 형이상학, 기호론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이는 .....모든 글쓰기는 미시적으로 볼 경우 어느정도의 과장과 <원상이탈>(복잡한 자연을 단순하게 문화화함)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따라서 글쓰기의 원초적 의미와 그 정당성에 관여하는 모든 논의는 상기한 구체와 추상, <붙어있음> 과 <떼어냄>, 컨텍스트와 텍스트, 주변과 중심 그리고 복잡과 단순사이를 매개하는 긴장의 맥을 읽는 것으로 출발해야한다.
3. <이방인> 과 <하얀전쟁>
p.128
이를테면 뫼르소가 살아내고 있는 경험의 事象들은 틀에 짜여진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서 보통명사들로 익명화될 수 있는 요소들이 아니다. 보통명사의 공공성과 악명성이 적실하게 담지해 낼 수 없는 삶의 복잡미묘한 변인들을 있는 그대로 살아내고 이를 자기식대로 언표하는 <기술적 정직>은 당위적, 도덕적 질책이 권위있게 운위되는 논의의 층위를 비껴간다.
4. 단순함과 복잡함: 글쓰기와 <복잡성의 철학>
p.137
뫼르소가 소위 자신의 <이방성>으로 인해 겪는 갈등의 구조는, 즉 그의 세계가 신문의 세계에 실릴 수 없다는 소통 불가능성에 있다. 경험의 사밀하고 복잡한 얽힘, 기계적, 인과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부단한 변전의 우연성울 속깊이 살아내는 사람이라면......사실의 배열로써 설명되는 세계가 인간의 구체적인 세상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 지를 뼛속깊이 체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뫼르소의 고백은 삶의 복잡성으로부터 제스스로 터져나오는 고백이다. 기하학적 정신으로는 어찌할 수없는 실존의 깊이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정직과 해방의 소리이다.
5. 一理의 해석학을 향하여
p.142
이 시대, 이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학문의 방향은 예를들어 새로운 글쓰기 방식의 모색으로부터 출발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점에서 서구적인 글쓰기의 방식 (말하자면, 각주에 올라타고 앉은 본문의 형식으로 학문성을 인준받는 방식)을 보다 창의적으로 점검하는 일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p146
나와 다른 차이들을 박해하지 않고 단순히 <일리가 있다>고 말해주는 동정적 태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의미와 이치의 권리 기반이 되는 컨텍스트와의 관련아래 특정한 텍스트 (행동, 명제, 혹은 사태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의미의 텍스트)가 일리있다고 판단하는 이유와 그 방식까지 해명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p 147
삶의 복잡성은 해석의 일리성과 밀접하게 제휴할 수 밖에 없다. 해석학의 역사가 묭료하게 지적하듯, 해석이 주제화되는 과정도 결국 복잡성을 지향하는 해석학적 정신과학과 단순성을 지향하는 근대 과학 사이에서 빚어진 긴장이 아니었던가. 일상인들이 자신들의 일상성 속을 순간순간 중층적으로 오가는 온갖 이해의 상충과 긴장을 큰 무리없이 다스려가며 담화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것도 일리라는 보편적 감각이 이미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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