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김영민 其. 2
‣복잡성과 잡된 글쓰기: 글쓰기의 골과 마루
p152
사태의 복잡성을 제 모습대로 읽어내되 이를 섣불리 단순화하려는 유혹을 참는 태도는 성숙의 가장 두드러진 징표일 것.
p153
삶의 현실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느낌이 피부에 와닿을 때 소설쓰기가 발생했다는 평은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나름대로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이다. 이는 복잡성으로써 글의 안팎이 이어지는 방식의 잣대를 삼고자 하는 태도인 셈이다. 이 복잡성은 우선 삶의 현실 속을 채우는 객관적 대상이 많아지고 또 많아진 만큼 그 대상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관심과 이해득실의 망이 심하게 얽혀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1. 삶의 복잡성, 그 전후좌우와 안팎, 켜켜와 층층과 면면을 일일이 어루만져주는 글쓰기
1-1 복잡한 글, 긴 글
P.155
복잡한 사태를 표현하고자 할 때 대체로 두가지 방책이 가능하다. 우선 복잡다단한 사태들을 단순화해서 글로 옮길 수 있겠다. .. 이런 식의 글쓰기는 중심과 주변을 정밀하게 차별할 수 있는 안목위에서 가능..
p.156
복잡성을 글로 대처하는 둘째 방식은 상술한 단순성의 글쓰기에 대한 반성의 기운과 맞물려있다.... ‘단순성의 매정함’에서 ‘복잡성의 관용’으로 옮겨지는 이 흐름은 해석학, 문학, 여러모양의 상대주의, 다원주의, 문학적 감수성의 확산과 심화, 생물학적 상상력의 증진, 탈중심의 유연성 그리고 구체성과 일상성의 재발견 등의 추세를 통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p.158
글의 구심력과 현실의 원심력을 조화시키는 것은 결국 글쓰는 이의 절충과 노력, 즉 구체적인 전략뿐이다. 소위 <존재가 언표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경지>가 있겠고, <침묵이 말의 원천적 결핍을 보상하는 경지>도 있겠지만...
1-2 탕자의 일리
p.160
마찬가지로 단칼에 부조해 낼 수 있는 본질에 경도되지 않으며, 뜻없는 현상의 조각과 가루에 만족하는 체하는 비현실적 허위의식도 경계하는 방책으로서 <패턴>이라는 보편성의 확보에 주력하는 것도 결국은 동일한 발상의 연장인 셈이다.
p.161
가장이 정한 가훈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뜻있게 추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머리가 제대로 박힌 젊은이 라면 어린 대로 나름의 성실함과 진정성이 있는 발상이다. 아버지의 가훈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선 탕자의 선택에는 대개 세가지 유형이 있다...... <돌아온 탕자>의 길.
p.162
요컨대 탕자의 귀가는 집을 나간 의도를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삶쓰기>에 실패한 모습의 돌이킬 수 없는 결말에 불과하다.
p.163
삶의 자율성과 글쓰기의 다양성(복잡성)을 희망의 근거로 삼고 가훈의 절망을 뒤로한 채 집을 나선 탕자의 다음 선택으로는 <끝없는 배회>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문제는 이러한 배회를 통하여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성인으로서의 자율성을 되찾고, 삶의 실제모습인 복잡성과 다양성에 솔직한 삶쓰기와 글쓰기를 원한다면 과연 한정도 기약도 없는 배회가 최선의 대책일까?
p.169
...탕자의 선택중 마지막 것은 이제 자명하다. .....그는 당연히 <자신의 집을 자신의 손으로>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자신의 생활세계를 늘 자율과 개혁적인 탄력성 속에 유지하는 것이며, 이 글의 논지에 맞게 말하자면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말로써 옮길 수 있는 글쓰기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p173
...즉 삶의 복잡성과 구체성속에서 일리라는 집을 짓는 글쓰기는 방법론적 원칙상으로 긴 글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잡된 글쓰기는 무한정한 배회로 이루어지지 않고 여기저기에 자신의 집들을 세우면서 옮겨 다닌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1-3 여백과 틈의 글쓰기
p177
글과 말로 다하지 못하는 부분을 여백과 틈 속의 교감을 통해서 잡아낼 수 있는 경지는 이미 그 글과 말을 넘어서는 경지일 것이다. 스승의 글을 읽고 스승의 말을 듣되 스승의 경지를 침범하는 성숙일 것이다.
2. 개성적 글쓰기
p.183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글쓰기는 특히 내가 비판하고 있는 <원전중심주의> 및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허위 의식과 공모하고 있다.
p188
글쓰기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그 결과는 삶의 선택과 지식의 축적이 전혀 만나지 못하는 지행의 괴리를 빚을 수밖에 없다. 보편적 인식의 진공성으로부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그 문제의 핵은 지식인의 삶이 생명없는 통찰과 활자로 가득차서 시들어간다는 점에 있다.
3. 구체성의 글쓰기
P.189
글쓰기의 추상성이 복잡 다양한 대상들을 보기 좋게 전지해서 일률적으로 기술하려는 중앙 집권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면, 그 구체성은 선험적으로 입력된 전지의 계획을 포기한 채 세상의 복잡성에 참여하여 체득한 이야기를 눈치 보지 않고 드러내는 지방 분권적 태도를 뜻한다고 할 것이다.
P.193
글쓰기의 구체성을 살리는 이상적인 방법은 지배적 담론을 삶의 일상적 현실과 맞붙여 주는 일이다. 물론 글의 원천적 단순성이 삶의 원천적 복잡성에 꼭 들어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 그러나 결국 <이론>을 피할 수 없다면 밖에서 빌려온 이론의 틀을 덧입히는 글쓰기 보다는 가능하면 삶의 현실경험을 바탕으로 자생한 이론을 만들고, 또 이 이론이 자신의 모태를 계속 돌아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글쓰기가 구체성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바람직 할 것이다.
4. 글쓰기의 임상성
P.196
우리 인문학 특히 그중에서도 철학의 글쓰기는 그 임상성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강조해야할 만큼 그 실천적 유용성이 매우 의심스런 지경에 봉착했다고 생각된다.
P.205
...인문학은 읽히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5. 글쓰기의 골과 마루
P212
결국 파도의 진행과정에서 보이는 골과 마루의 순환은 조화와 균제의 글쓰기라는 이념을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이미지가 된 것이다.
‣복잡성, 컨텍스트, 글쓰기
1. 삶의 모습에 알맞은 글쓰기
P216
자연과학의 그늘에서 벗어난 글쓰기라는 수동적 태도로 만족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탐색에 어울리는, 창의적이며 탄력성이 있는 글쓰기의 방식을 보다 능동적으로 모색하자는 입장이다.
2. 복잡성과 친숙성
P.218
자세히 보면 <친숙함>은 묘한 이중성을 띤다. 말할 것도 없이 친숙함이란 관계의 정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쌍방의 관계가 우의속에서 진행되어 서로 속을 터놓을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이 생기면 우리는 이를 좋은 의미의 <친숙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친숙함이 깊어질수록 친숙함의 의식이 오히려 엷어진다는 역리...
3. 복잡성, 컨텍스트성 그리고 단순화의 병증
3-1 <나는 그것이 태양때문이었다고 설명하려했다> : ‘이방인’의 경우
P.223
법정에 선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눈이 부셔서 ) 그 아랍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그이 말이 뒤죽박죽이 된 것처럼, 그의 <진술>은 <변명>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p224
뫼르소는 느껴진 자신의 삶과 사랑이 서로 다른 논리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모르는 것은 아니다....자신이 느끼는 삶의 복잡성과 우연성, 그리고 모순성을 있는 대로 솔직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애쓰다가 급기야는 <말이 서로 뒤엉켜 엉망이> 되어 버린다. 엉망이 된 뫼르소의 말은 낮선 바깥의 세계와 어색하게 대면하고 있는 그의 내면세계의 곤혹함을 잘보여준다.
3-2 ‘서편제’의 경우 : 소리꾼의 예술과 아버지의 인륜사이
p247
앞은 행위자를 <소리꾼>으로 보고 또 그 행위의 지평을 <예술>에 두는 반면, 뒤의 논점은 행위자를 <아버지>로 보고 또 그 행위의 지평을 <인륜>이나 <도덕> 등에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논쟁의 실질적 양상은 같은 잣대, 컨텍스트속에 담긴 두 앙숙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세계와 다른 컨텍스트 사이의 <무심한 바라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텍스트나 메시지의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지평과 컨텍스트의 <다름>이 있을 뿐이다. 예술의 세계에 컨텍스트의 우선권을 부여하는 소리꾼과 인륜과 도덕의 세계에 컨텍스트의 우선권을 부여하는 아버지는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컨텍스트의 다름을 이해하거나 이에 적절한 조처를 취할 방도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p249
다만 한가지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은, 뫼르소에 대한 판단과 선고는 상식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법리라는 컨텍스트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일견 매우 단순해보이는 사실이다.
3-3 복잡성, 컨텍스트의 역동성 그리고 패턴
p.250
잠시 논의를 정리해보자. 나는 위에서 삶과 세상의 복잡성을 <컨텍스트의 복수성과 그 역동성>이라는 표현으로 좁게 정리할 수 잇을 것이라고 말했고, 또 지금 문제 삼고 있는 단순화의 병증도 바로 이 표현을 좇아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상론한 것처럼 우선 컨텍스트의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단순화의 병증을 지적하고자 노력했다.
P 251
컨텍스트의 역동성은 컨테스트의 복수성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요컨대 특정한 텍스트나 컨텍스트의 생김새및 특성 속에 역동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텍스트의 대조를 통하여 드러나는 컨텍스트들의 긴장과 조화 속에 역동성은 살아 움직인다.
p254
컨텍스트의 역동성은 어느 특정 컨텍스트 속에 위치한 요소들의 속성이나 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선 삶의 복잡성이라는 준존재론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컨텍스트의 복수성을 읽은 다음, 이 많은 컨텍스트들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어떻게 혼동과 무리를 야기시키지 않는지, 거대 컨텍스트의 독재에서 볼 수 있는 인위적 정돈과 진리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수많은 삶의 세계와 그 다양한 층위들의 긴장을 잘 살아내고 있는지를 일리로써 파악하는 것. 바로 이것이 컨텍스트에서 역동성이 문제시되는 근본이유이다.
p256
잘라 말하자면, 패턴이나 <형태>는 역사성의 무게가 남긴 연속적인 적응의 흔적으로써, 현상세계및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존립과 영속을 위해서 움직이는 <길>을 말한다. 왓슨은 DNA나 의식 그리고 생명이나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등을 패턴이라는 형태의 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생명이나 의식이라는 역동성을 그 소재지별로 설명하지 않고 패턴화한 형태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생명은 생명현상의 기본적인 패턴(막을 형성하고, 신진대사와 성장을 계속하며 그리고 자신을 복제할 수 있다는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의식은 뇌 내부의 사태들이 보이는 형태적 패턴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p 265
컨텍스트의 역동성은 공동체가 진화하고 복잡해지는 장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현실이다.... <진화의 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의식의 등장은 컨텍스트의 복잡성과 역동성을 인간들의 현실로 만들어 놓았던 매체이다.
4. 잡된 글쓰기와 우리 인문학의 미래
p269
인문학이 의미와 가치의 학문이고, 또 의미와 가치의 원천이 컨텍스트(의 복수성과 역동성)라면, 컨텍스트가 텍스트에 침투해 들어오고, 텍스트가 컨텍스트로 확산해 나가는 양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감수성이야말로 인문학의 글쓰기를 향도하는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며 , 여기서 거론하는 개성적 글쓰기도 사실 이에 다름 아니다.
p274
글은 아무래도 여러 컨텍스트들의 유기적 역동성을 있는 그대로 잡아낼 수 없는 법이다. 언표의 과정속에 본질적으로 포함된 단순화와 왜곡은 차치하더라도, 글은 특정한 하나의 컨텍스트와 이를 배경으로 서있는 텍스트 사이의 상관구조(패턴)을 밝히는 것 뿐이지, 정신적 삶의 복잡다단한 지평을 형성하는 여러 컨텍스트들과 이들의 역동성을 한 번에 잡아둘 수 없는 법이다.글은 단순화하고, 추상화하고, 일반화하고, 표준화하고, 과장과 왜곡을 일삼는 스스로의 특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텍스트를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텍스트가 <서는>터와 배경과 그 층위를 컨텍스트라고 볼 때, 근본적으로 글쓰기는 단순히 텍스트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특정한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스스로의 의미와 위상을 부여받는 원천지인 컨텍스트사이의 관계를 밝혀주는 작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요컨대 글쓰기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는 행위이며, 글은 그 관계가 언어를 통하여 패턴화한 것이다.
‣컨텍스트의 해석학
1. 인문학의 글쓰기 : 원리와 사례의 피드백
p279
이 글은 세상의 복잡성을 컨텍스트의 다층 구조로써 밝히려는 시도인데, 논의의 궤를 메터보다는 주로 사례분석에 두려고 한다. 나는 사례의 분석, 즉 예증과 그 적실성의 확인을 매우 중요한 철학적 탐색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p280
메타이론의 원리적 구성에 주로 매달려 왔던 우리들은 예화중심의 이야기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를 왠지 탐탁치 않게 느낀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기피속에서, 수입된 문화와 학문의 와류속을 버둥거리면서 제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남의 굿판을 먼발치서 기웃대며 흉내나 내다가 떡이나 얻어먹는 학인들의 사대주의와 패배주의의 한 단면을 본다.
p282
..해서 나는 인문학의 글쓰기 방식으로서, 사례의 분석과 메타이론의 제시라는 두 가지 요청중 어느 한 가지를 희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되었다. 철학에 대한 적지 않은 오해와 소문들은 이 두가지 요청을 조화있게 병치 시키지 못하고 어느한 쪽으로 심하게 경도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글쓰기로 말미암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잇을 것이다.
p283
...메타적 공간과 실천의 현장을 부단히 상호조회 (cross reference)하는 글쓰기의 방식을 선호하며 , 이런 글쓰기의 방식이 정착되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는 정신적 난국도 어느 정도 수습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2. 갈릴레오의 성공
p292
갈릴레오의 성공은 다양한 경험적 복잡성을 괄호속에 묶어 버린 채 선택한 층위의 자기 정합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3. 아아 우리들의 심청이
p304
이제 문제는 순수한 인식론적 해명이 아니라 <문화와 인성을 근거로 한 이해와 정서의 기존 지평의 지형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집약된다. 따라서 심청을 이해하는 일은 정보의 발견과 축적에 따른 인식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심청의 세계 그리고 심청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이 공유한 정서의 지평을 드러내고 <참여>하는 문제이다.
4. 무릅과 무릅사이
p 315
하나의 사태를 이해하는 일은 우선 그 사태를 겹겹이 두르고 있는 컨텍스트의 중층구조에 <절망>하는 일이다. 그러나 절망이 포기에 이르지 않는데에서 학문의 공간과 열정은 시작된다. 내가 이해하는 해석이란, 한편 삶과 세상의 복잡성을 온 몸으로 살며 느끼되 머리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고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바닷물을 한손에 담아보려고 애쓰지만 물은 종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만다. 흘러내리는 모습에 절망하지만, 그 물도 필경은 바닷물임을 흡족해 하는 것. 내가 보는 해석은 언제나 인간됨being-human의 고백을 넘어서지 못한다.
5. 인간됨의 컨텍스트. 컨텍스트의 인간됨
p319
<학문을 인류와 역사의 차원으로 확대시켜 본다면, 학문을 진위라는 경직된 이분적 구조로써 분류하거나 평가할 수 없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진위의 문제가 아닌 것을 진위의 문제로 보는 이들을 유아라고 평한 것은 유아의 속성에서 보더라도 적당한 조롱이다.
....
인문학은 특별히 그러하지만, 나는 자연과학을 포함한 학문 전분야는 <진위>가 아니라 <성숙>의 문제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해를 컨텍스트의 다중 구조와 그 역동성의 빛에서 보는 태도는, 궁극적으로 내가 전개하고 있는 <일리의 해석학>의 토대와 정당성을 제공해준다. 이해를 해석으로 읽고, 해석을 본질적으로 컨텍스트의 경합으로 읽음으로써 <보편적 힘의 해석학>을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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