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讀

산책과 자본주의. 김영민. 其.1

eyetalker 2007. 3. 1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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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자본주의, 김영민, 늘봄. 2007년2월


‘자본주의’가 도처에서 문제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과연 그토록 몹쓸 녀석 이었던가?


이놈의 자본주의가 뭐길래 (‘사랑이 뭐길래‘가 아니고.), 시골 장마당의 개처럼 아이들 돌팔매질에 대가리가 깨지거나(아주 간혹 어쩌다),  지나가는 승용차 뒷바퀴에 그 목숨마저 위협받고 있는 신세가 된 것일까?


물론 ’던지는 아이‘와 ’(광란의)운전자‘ 모두 특정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가정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그러나 ....아다시피, ’자본주의‘는 대명천지를 별 이상 없이 활보 중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인질이기도 하고 포로이기도 하다. 막스가 내보낸 그 ‘유령’마저도 효과적으로 참살하고 매장한 이 강고한 ‘이즘’은 조선시대의 서원에 똬리를 튼 선비들 무리처럼 우리 같은 현대판 노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엄연히 가지고 있다. 단지 ‘오나‘라는 계급으로 선수교체가 일어난 것 뿐.  웃기는 건, 신계급 '오너'들은 현대판 '선비'(급 지식인) 들을 턱짓으로 오라 가라, 개부리듯 하며, 걸핏하면 머나먼 대양속의 '희망퇴'인가 뭔가하는 작은 섬으로 보내거나, 것도 싫으면 몽둥이로 그냥 때려잡고 있다. '김훈'과 '김영민'은 그래서 때려치고 나왔지만....남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밥'의 문제가 지상과제이고, 또 그래서 요놈의 '산 입'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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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영민 교수가 말하는 ‘자본주의‘. 즉, ’산책‘의 건너편에 도사린, 음울한 표정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잠시 알아본 연후에 이 책을 읽어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본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책은 , 어려운 ‘다스 카피탈‘이 아니라,,, 년전에 읽은 ‘복거일‘의 저작, (얄팍한)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2005년1월, 삼성경제연구소 刊)가 적당해 보인다. 아래는  그중 몇몇 core excerpts.


-Quote-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경쟁을 본질적 원리로 삼는다.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까닭이, 그것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치열한 경쟁이라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이다. 자연이 바로 경쟁에, 실제로는 전혀 사정없는 싸움에 바탕을 둔 체제이기 때문이다.


애드워드 윌슨:  “ 자연은 싸움터입니다. 잘못 생각하지 마시오.”

"Nature is a battlefield, make no mistake."

 

모든 생명체는 자연이라고 불리우는 싸움터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행복한 동물이 아니고 효과적인 동물이 되도록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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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자본주의의 이상형의 그것은 모든 재산의 획득은 정당하게 이루어진다고 가정한 것.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그러나, 역사의 칠판에서 불의를 깨끗이 지우는 일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하나?

여전히 자본주의체제에서 다른 체제들에 비해 그 불의의 정도는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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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에서 모든 경제주체가 자유롭게 경쟁하고 사회는 그런 경쟁을 통하여 끊임없이 보다나은 길을 모색한다. 하이에크의 지적대로 경쟁은 ‘발견’절차이다. 시장경제의 높은 효율은 바로 그러한 발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경쟁에서 처진 사람들을 위해 사회안전망을 설치한다. 따라서 사회전체는 최대한의 복지를 누리며 불행하거나 가난한 사람들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을 얻는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 실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미워한다. 그런 미움은 사람의 마음이 시장경제를 좋아하지 않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긴다.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흔히 이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시장에 적대적인 이념이  추종자들에게 매력적이고 자명하게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요인이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처지를 늘 타인들과 비교하며 자연히 부러움으로 가득찼다. 사람들의 그러한 행태는 시장경제에 호의적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처지에 대한 판단을 주위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내린다. 당연히 사회의 최상층에 자리잡은 사람을 빼면 모두가 자신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반감이 시장경제에 대한 반감으로 발전한다. 부러움의 정치는 결국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Unquote-


자, 그러면 김영민의 산책은 어떤 것일까?


P.15


"내가 말하는 ‘ 산책’은 이 전일화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해서만 성립하는 어떤 태도와 실천을 뜻한다. 그 ‘걷는 주체’는 자본제적 셈평의 교환 속에서 우선적으로 ‘상처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산책은, 내가 ‘세속’이라는 표현으로 표상한 자본주의적 체계와의 마찰로 인한 상처의 각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산책은 무엇보다도 ‘자본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어떤 삶의 양식’을 지향(한다).


(과연, 창의적으로 불화할 만큼 튼튼한 ‘갑주’를 걸친 사람이 얼마나 될지, 대형 의문부호를 철거할 수 있을 듯 싶지 않다.)



1장 산책과 자본주의


P.27

산책의 탈자본주의적 창의성은 무엇보다도 너와나 사이의 관계를 자본제적 교환의 바깥으로 외출하도록 돕는데 있다..... 총체적으로 우리 삶의 원형적 모습이 등가적교환의 외부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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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누가 걷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상처받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 상처는 “자본제적 삶의 양식’, 그 체계적 식민화의 그늘“과 같은 것으로 정의된다. 그 상처를 매개로 ‘산책과 자본주의는 서로 다투거나 사통한다‘고. 아마도, 저자는 별도로 정의해 두지 않은 ’자본주의’란 어떤 ‘악마성‘이, 그를 미처 피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심히 상하게 만들었고, 그 상처입은 자들은 특정의 목적을 전제하지 않은 ‘산책‘이라는 생활양식을 통하여 저항을 기도한다는 뜻의 이야기를 하려하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쉽지 않은 이야기다. 사실상 하루벌어 하루사는 현실속에서 노비들은 그의 ’산책’이 한가한 한량놀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산책을 하긴 하되 조심스레, 사위가 어둑해지는 해거름에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충고가 필요하지 싶다.


 

2장 체계와 무지


‘알면 다쳐’라는 코미디의 유행어를 허위적인 ‘체계’와 그에 함몰된 (의식적)‘무지’의 관계에 해석을 가한다. 저자가 들고 나온 것은, 우선은 이사회에 ‘과잉된’민족주의. 한국사회의 배타적 민족주의 담론이 타 담론적 코드와의 ‘ 連接’을 어렵게 만든다는 불편한 심기. 공개를 거부하는 페쇄성의 민족주의가 자유주의 철학자에게 가하는 압박에 대한 토로.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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