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讀

천개의 공감, 김형경

eyetalker 2007. 3. 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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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공감. 김형경. 2006. 한겨레


‘심리치유 에세이‘란 말이 작가의 이름에 붙어있다. 이것은 부제일까? 아니면 작가가 ’심리치료사‘자격증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뭇사람을 기망하려하는 것일까. 김형경은, 나에게 있어서는, 한女流 소설가에 ’지나지 않았던‘ 적이 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처음 읽고 그녀에게 깊은 실망을 맛보았던 기억이 있다. 뭐 이딴 소설이 다있어? 다행히 나의 거친 발언이 그녀의 운명에 일말의 영향을 미친 흔적은 없는 듯하다.


몇 년 전, ‘사람풍경’이라는 책을 샀다가 그날 밤 어디선가 술을 먹다가 버릇처럼 누군가에 줘 버리고 다시는 그 책을 사지 않았다. 이제, 이 책을 두 번이나 사버렸다. 하나는 읽으려고 샀고, 다른 하나는 갑자기 생각난 누군가에 보내버렸다. 같은 책을 두 번씩 사는 습관은 언제나 조금 씁쓸한 느낌을 남기는 법. 같은 돈으로 다른 기막힌 뭔가를 살 수 있었는데., 하지만, 그만큼의 기회비용으로 얻은 가치의 크기는 , 아직 가늠할 수 는 없으나, 온전히 나의 몫이 될 것이다. 


정신분석이란 어려운 것일 게다. 인간뇌란 워낙 연한 순두부같아서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원상회복이 거의 불능하고 실제의 순두부 백반처럼 참기름까지 흘려버리면 고춧가루와 섞인 그 무질서한 혼합상은 원상에 대한 기억자체를 아예 아득하게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1부; 자기알기

2부; 가족관계

3부; 성과 사랑

4부; 관계맺기


1,2부의 답은 ‘우울한 자아‘의 근원과 그 해결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아마도 P84, ’이대로 산다면 죽을 때 후회할 백가지 일’을 나름대로 나열하고 그것을 시도해보는 것으로 해결의 돌파구를 삼으라는 충고가 유효할 듯 느껴진다. 너의 소위 그 ‘문제’는 타인의 눈에는 너무 작아 보이거나 뵈지도 않고, 심지어 벗어서 억지로 보여주기 전에는 아무도 보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너는 버려진 존재로 니 맘대로 살면된다‘ (요건, 내가 한 말.)


3부. 사랑과 성욕을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무척 흥미롭다. 결국 억압된 성의 자율적 통제와 해방은 심적 갈등과 부조화의 탈출구로 활용가능하다는 노골적 설파다. 물론 대부분의 동종서적이 그런 것처럼 원하지 않거나, 또는 강제당하였거나 하여 그 자유의지에 기반한 기쁨과 환희로서의 성활동, 또는 자연스럽고 원죄없는 성의식에, 심각한 상처나 왜곡의 흔적을 간직한 경우를 상정하는 경우를 다수 예거하고 있기는 하다. 전반적으로는, 누구나의 인생행로에서 겪어야만 하는 각종의 고난, 좌절, 갈등을 극복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억압을 해제하고 즐거운 개방과 해방으로서의 성, 도구로서의 성욕. ‘우리 결혼합시다’라는 당당한 발언. 사랑하라,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아픈 구석을 잘 보살펴라. 이별해야한다면 당당하게. ‘침몰하지 않는 사랑’ 같은 잔다크적 용맹이 필요하다는 견고한 발언의 모음이다.  


결론은, 분노와 불안을 암장하라는 것인데. 타이레놀 한 두알로 될 일이 애당초 아니므로 정해진 답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 p290이다. 결국 ‘[니]”는 [췌]하기나 해라’란 암시일까?


포스트스크립트. 


“공동체가 마련해주지 못하는 삶의 틀을 스스로 내면에서 스스로 발견하고, (오직)자기만의 사랑의 서사, 삶의 서사‘를 쓰라.”


“... 방치해둔 정신의 원시적 영역을 되살리라” p331.  ‘정신의 원시적 영역‘이라하면?



사단칠정인가?


측은지심 (타인의 불행을 아파함), 수오지심 (부끄러움), 사양지심 (타에 양보), 시비지심(선악시비의 판별)은 맹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선천적 도덕’.


칠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감정. 인간이 외부 사물에 접하면 여러 가지 정이 표현되는 심리 현상이다.



2007년 3월 밤. 황사에 실려올 고비의 원시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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