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영화제(2)
‘ 몰입과 열정 ’ - 광주 가는 길 위에서
(조율연)
꺾어진 중년 나이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열정적으로 빠진다는 건 줏대가 없기 때문이고 확실한 철학이 부재하다는 것, 나아갈 방향을 정하지 못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입지의 나이건만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채 마냥 서성대고 있다. 간이역! 하지만 아직 종착역에 이르기엔 약간의 시간이 있다. 하므로 너무 초조해 하지 말 것.
생활의 일부나 다름없는 영화보기와 독서, 글쓰기 행위는 결국 목표를 찾기 위한 하나의 시도일 뿐이다. 열아홉 나이쯤이었을 거다.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전주에서 열린 한동일 피아노 연주회에 간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연주회가 흔치 않은 시절이라 거의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도시락엔 전구지(부추) 부침이 가득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당시 비행장에서 흘러나온 싸구려 깡통기름으로 부침을 자주 해 주곤 했다. 고기는 명절 때나 겨우 먹을 정도였고, 달리 기름기 있는 음식이 없던 시절이라 전구지 부침만이 유일한 지방질 보충원이었다. 그나저나 하필 전구지 부침이었을까. 워낙 궁핍한 시절이라 달리 싸줄만한 반찬이 없었을 것이다. 한동일이 연주하던 화려한 베토벤 소나타와 초라한 전구지 부침. 그런데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자 아내는 이미 거실 식탁에 점심상을 차려놨다. 광주에 가려면 시간이 빠듯하니 미리 점심을 차려두라고 연락해둔 터다. 평소의 상차림이 아니었다. 대충 한 끼 먹으면 될 것인데 너무 많이 차렸다. 아내는 먼 길 떠나는 나를 위해 온갖 반찬을 다 차려낸 거다. 문득 고단했던 6, 70년대로 회귀하는 느낌이다.
젊은 시절부터 뱃생활 하느라 객지 생활에 익숙한 편이다. 스무살부터 떠맡은 가장 아닌 가장 역할. 장남인 내가 집안을 꾸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덜 쓰면 가족들이 풍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 푼이라도 아끼자는 게 변함없는 생활신조다. 그래서인지 집만 떠나면 악바리 구두쇠 근성이 되살아난다. 조악한 식사나 어지간한 험한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니 객지에서 끼니나 제대로 챙겨 먹을까. 아내는 행여 하는 심정으로 성찬을 차려낸 것이다. 부창부수라더니, 근천스럽기는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속옷과 면도기, 노트, 책 등 미리 챙겨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백낙청, 김현, 김지하, 김용옥, 강준만, 그리고 최근의 이정우, 김영민에 이르기까지 나에겐 흠모의 대상이 끊이지 않는다. 요즘은 한일장신대 철학과의 김영민 교수에 푹 빠졌다. 누군가를 흠모한다는 건 그의 저서를 몽땅 읽는다는 뜻이다. 요즘 전작주의라는 말이 유행이던데 그 말과도 비슷하다. 그렇게 말한다면 도스토예프스키, 조셉 콘라드, 마르셀 프루스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도 흠모의 대상인 셈이다.
직장과 가정살림 꾸리느라 늘 분주한 생활이지만, 책과 글쓰기, 영화가 아니고는 달리 재미가 없고 삶의 의미 또한 없어 보인다. 좀 과장한다면, 나에게 영화와 글쓰기는 밥과 그다지 차이 없어 보인다.
아파트 근처 한길문고에서 김영민의 <자색이 붉은 색을 빼앗다>와 계간 <문학과 사회> 가을호를 사들었다. 김영민이 자주 언급하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자연과 정신>, 신실용주의자 철학자인 로티의 <우연성, 연대, 아이러니>와 로티 연구서인 김동식의 <로티의 실용주의 철학>. 김영민의 <문화, 문화, 문화>도 함께 구입하려고 했지만 <자색...> 외에는 없었다.
버스에서 <자색...>을 읽다. 내가 김영민에 몰입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 글쓰기의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평론 장르에 관심이 많은지라 주로 비평 분야 쪽을 읽는 편인데, 문학평론가들은 주로 작품 해석에만 치중하지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그리 드러내지 않는다. 비평 장르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저서를 주로 인용하는 김영민의 글 스타일은 메타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소설가들은 비교적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자주 토로하는 편인데, 평론가들은 그렇지 않고 마치 기계적으로 작품을 해석한다.
그러나 김영민은 철저하게 글쓰기의 논리를 의식하고 있고, 이를 문제화 한다. 내 보기에 그의 글쓰기론, 혹은 사유의 핵인 “컨텍스로, 패턴으로” 는 베이트슨으로부터, 그리고 도저한 자유주의자로서 아이러니서의 인문학, 혹은 동무론 등은 로티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철저한 자유주의자인 김영민의 사고가 마음에 끌린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아무데도 얽매이지 않고 늘 혼자이고자 하는 것.
금남로 혹은 영화의 거리
궁극적으로 모든 예술은 현실을 겨냥해야 마땅하다. 현실이 아닌, 이 곳을 초월한 곳이란 공허한 우주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까. 예술은 현실을 떠나려는 속성이 있지만, 언젠가 떠난 현실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예술을 위한 예술’ 즉 탐미적 예술관도 일리가 있다. 정답은 따로 없을 터이니. 그러나 나는 예술과 사회를 동전의 양면으로 생각한다. 만약 예술이 구체적인 삶을 대상화하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라도 예술과 결별할 수 있다.
이런 내 예술관은 비교적 사회성과 무관해 보이는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달에 한 번 군산의 ‘뮤직4YOU’에서 여는 토요음악회에서 내 해설의 포커스는 두 가지에 맞춰 있다. 하나는 음악을 대중과 가깝게 하려는 것, 그래서 음악이 생활의 일부가 되게 하려는 것. 또 하나는 음악의 사회성이다. 모든 음악, 아니 문화는 당대 사회의 역사, 사회적 배경과 맥락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연주나 노래 자체의 음악적 요소를 먼저 언급해야하지만 아울러 그것이 생성되게 된 사회, 역사적 배경을 함께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음악을 둘러싼 역사, 사회성이란 구체적 현실을 의미한다.
E. H 카아가 말한 대로 역사란 박제화 된, 단지 실증적인 언급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와 부단히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 나의 예술관은 이런 카아의 역사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모든 예술은 현재적 관점에서 부단히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광주 영화제 역시 저 ‘80년대의 광주’ 라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나의 이번 광주영화제 여행도 궁극적으로는 도청과 금남로에서 벌어졌던 그 시절의 생생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초. 원양어선에서 막 하선한 직후라 당시 국내 실정에 대해선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록 동참은 못했지만 이런 문제의식만큼은 두고두고 글쓰기의 화두가 되어야 하고, 글의 중심에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부채의식으로서의 글쓰기.
등에 진 륙색과 노트북을 손에 든 내 차림을 새삼 돌아봤다. 거리는 십대 아이들로 빼곡하다. 예전 같으면 차림새를 의식하지 않으련만, 은별이와 지훈이 또래의 청소년들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자꾸 나이가 의식되고 외모에 신경 쓰이는 거다. 거리를 꽉 메운 젊은이들. 이들이 영화를 제대로 알아서 그러는 게 아닐 거다. 영화제라고 하니 그저 들떠서 저럴 뿐이다. 거리야 요란하지만 정작 극장 안은 텅 비어 있을 게 분명하다. 상영관인 ‘시네시티’를 물었지만 극장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알렉스 콕스와 베르트낭 도넬리
컬트. 소수의 매니어들에 의해 그들끼리 은밀히 경배되는 것. 내가 처음 컬트를 대한 건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 이다. 아마 린치만큼 일관성 있게 컬트적인 감독도 드믈 것이다. 예측 불허의 기괴함, 상투성을 비트는 파격성. 앞뒤 연결이 안 되는 비논리성. 진지함과 코믹함의 부조화. 잔혹. 폭력성. 상징성. 내러티브와 플롯의 파괴 등등. 그런 점에서 알렉스 콕스도 컬트 감독으로 분류된다.
알렉스 콕스의 특징은 <리포맨>보다 <시드와 낸시>에서 더 잘 드러난다. 하위문화로서 대중문화적 요소, 폭력적 요소를 마구 뒤섞으며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이번 상영작인 <복수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2011년 리버풀이 배경이지만 동시대로 봐도 무방하겠다. 뒷골목 불량배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 어두컴컴한 필름누아르적 분위기. 알록달록한 의상, 강렬한 사운드의 대중음악. 변태와 근친상간. 어두고 폭력적인 토마스 미들튼의 소설 <복수의 비극>(1607년)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분위기 역시 원작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알렉스 콕스는 근친상간, 부조리,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폭력과 혼란스런 분위기를 사회 비판의 매개로 삼는다. 듀크 집안으로 대표되는 귀족층과 빈디치로 대표되는 빈곤층. 알렉스 콕스는 계층간의 대립을 직접 표면화 하진 않지만 황금만능주의, 근친, 폭력, 권력욕에 불타는 듀크 집안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귀족 계층의 부도덕함을 강력히 비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이 잠깐 등장하는데, 비판의 화살이 은근히 황실을 겨냥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러나 <복수의 비극>은 태작으로 그치고 말았다. 주인공 빈디치의 복수의 일념이 그리 절실하게 드러나지 않은 탓이다. 물론 알렉스 콕스는 무거움을 가볍게, 해학적으로 풀어가는 스타일이라 그러겠지만, 아내의 독살 장면 이후 빈디치의 괴로움이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묘사된 감이 있다.
또한 예의 폭력적인 장면과 듀크 일가의 잔혹한 살해 장면에서 보듯 빈디치의 복수심은 철저한 계획과 절치부심의 결과임을 알 수 있지만, 가벼움과 해학성을 장기를 하는 콕스의 스타일과 왠지 겉도는 것 같다. 요란스러움과 화려함, 대중문화적 요소를 빈번히 사용하는 건 좋은데 빈디치와 듀크의 대립과 갈등적 요소로 승화되기엔 너무 피상적이다.
그러나 알렉스 콕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영화적 스타일은 우리영화가 참고해야 할 점이 있다. 최근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역시 활달한 대중문화적 기법, 상상력과 컬트적 요소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나아가 한국영화에 새로운 장을 연 모범적 사례인데 <지구를 지켜라> 외엔 이런 류의 작품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따라서 데이비드 린치나 알렉스 콕스처럼 창의적인 상상력, 무거움, 진지함을 가벼운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 같다.
(?)
난 본래 이렇게 생각했다.
[철학은 우리의 삶과 조금은 떨어진 고상한 것에 대한 값비싼 고찰이며
과학은 인간의 이성적인 기술과 도구로 만들어진 화려한 놀이이며
예술은 본래 그 순수함에서 떨어져 그 순수함을 표현하기위한 도구로 되어버렸다.]
물론 정리되지 않은 - 머리에 살짝 얹혀있던 - 예전의 생각을 과장되게 표현한 부분이 없지않다. 어쨋든 예전의 나의 생각은 나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아는것이 없고 배운것이 짧아도 내가 느낀 하나의 인상은 나의 생각이요 곧 '사람'이 느낀 그 무엇이니까. 또한 지금부터 내가 말할, 예전과의 다른, 바뀐 생각은 그것이 더욱 올바른 혹은 적합한 그 무엇도 아닌 단지 생각의 흐름일 뿐이지 어떤 우열을 정하려 함이 아님을 말해둔다.
최근에 나는 급격한 사춘기(?)를 맞이하였는데 그것은 내 생각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것이었다. 과학, 예술, 철학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 단어의 개념을 정의할 때 부터 이미 조금 어긋나있었던듯 하다.
난 성급한 일반화를 피하고 싶어 앞으로 말할 모든 상황을 일단 '나'의 생각으로 말하겠다.
철학
난 그러했다. ' 철학은 너무나 고상한 것이다 '.. 나에겐 땀흘리며 축구하는 순간이 중요하고 기뻤지 어떤 고찰을 통한 깨달음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에 대해 고차원적인 철학을 하는 그들이 그들의 실생활에서 과연 얼마나 행복할지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생각했다. 철학의 메타적 -형이상학적- 성격에서 항상 문제되는 비판적사고의 질문인 "왜" 라는 것은 나에게는 사실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는 결코 먼 이야기는 아니였다. "왜" 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맹목적이고 근원적인 믿음에대한 재해석이며 그 해답을 찾기위한 우리의 방법은 인과관계의 파악이다. 인과관계에 대한 파악이란 우리 행동과 사고의 연결고리는 되짚어보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것 (우리의 사고, 행동) 의 모순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과정을 심화 시키기도 한다. 연결고리를 되짚어 가는 과정에서 이미 알고있던 믿음이 부서질 수도 있으며 새로운 인과관계(의미)를 알게 되기도 하며 결국은 우리 본래 존재와 가까워 진다. '왜 인간은 행복해지려할까'에서 출발한 질문은 그 인과관계를 따지다보면 '왜 가정을이루려할까' '왜 공부를 하려할까' '왜 돈을 벌려할까' '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할까'... 처럼 결국은 우리네 삶과 밀접한 것에서 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철학은 먼.. 고상하기만 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그대로의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서 철학 자체에 빠져들어 허우적대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논외로한다) 결국 철학은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는 대전제 속에서 심화되어가는 인식의 체계, 방식, 방향의 연구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것에서 떠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정말 가까운 이야기이며 따라서 결코 고상하지 않다.
과학
난 예전에 그러했다. 과학은 철학에 비해 덜 순수하다. 이러한 선입견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예술과 철학이 고차원이라면 과학은 어떤 한계가 있는 숫자 -혹은개념- 의 놀음(?) 이라 생각하기 쉽다. 또한 철학과 예술은 우리네 인간의 감성과 느낌에 더욱 가까우며 과학은 다른 세상의 모습처럼 인식하기도 한다. 흔히들 철학자는 관용적이며 과학자는 자신의 생각을 굽힐줄 모르는 개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과 공학(engineering)의 개념 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선입견일 수도 있다. 흔히들 과학을 학문적으로 배우지 않는 사람에게 과학의 의미는 '기술'로써 받아들이기 쉽다.
기술은 어떠한 사물의 특성과 현상을 풀이함에 있어 과정이 생략된 결과물의 산출이다. 즉 무엇을 만들면 된다. 더 단단한 무엇을 만들면 된것이고 더 잘 움직이는 무엇을 만들면 되는것이다. 이러한 기술을 많은 문제(환경문제 등)을 가져왔고 흔히 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비판은 주로 기술에 국한되어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science)은 결과와 동시에 그 의미와 원리에 대해 탐구한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이해이며 수학공식으로 떨어지는 숫자놀음이라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이해의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공학은 과학적 원리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아직 모르는 무언가에 대해 예상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에 의미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학의 성격이다. 흔히 과학이라하면 무슨 법칙 무슨법칙, 무슨 공식 무슨 공식, 실험의 가정과 가설을 통한 검증 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것은 언뜻 보면 전우주적인 이야기가 아닌 소꼽장난처럼.. 우리가 만든 어떤 공간과 개념속에서 허우적되는 학문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공학도인 나 조차도 사실 이러한 생각을 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그러한 선입견은 '배우지 않음'에 있다. 배우지 않음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먼저 철학과의 비교가 필요한데 철학과 과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의 출발점에 있다. 철학과 예술은 그것이 어떠한 심화된 발달과정을 가졌든 간에 출발점이 인간 그 자체이다. 우리 모두는 - 배우지 않은 사람또한 - 감성과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철학과 예술은 그것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이 어떠한 고상한 표현을 쓰던지 간에 출발점이 우리자신, 그 자체에 있기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친숙하게 느낀다. 반면 과학은 그 출발점이 인간이기보다 자연에 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 온도가 올라가면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질이 어떠한 원자로 이루어지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는 언뜻 생각하기에 우리와 가깝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이해는 결국 우리에 대한 이해이다. 자연과 인간은 다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과 우리를 따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전지전능한 신이라 생각함과 같다)
여기서 다시 '배우지 않음' 에 대해 이야기하면. 과학의 출발은 인간의 바깥인 자연에서 시작함으로 문득 생각하기에 우리에게서 먼 이야기로 들린다. 이것은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이다. 어떠한 법칙의 개념을 외우는 것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개념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탐구과정은 오랜 시간 고찰된 인간사고의 총체이며 이는 그냥 멍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과학의 많은 부분은 실제의 인간생활에 직접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결국 과학과 철학은 결국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철학 혹은 과학을 하는 것은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다. 하지만 그 출발점이 다른데 철학은 우리네 속에서부터, 과학은 자연의 이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에 있다. 같은 지점을 향해 함께 나아가나 그것이 쉽사리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그것은 우리네 생과 앎이 너무나 짧다는데 있다. 우리의 생각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3차원과 4차원의 예) 삶의 시간또한 너무나 제한적이다. 그래서 과학과 철학의 공유되는 부분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우리는 단지 '우리가 못할 것은 없다' '답답해 할 것 없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앞으로 또다시 앞으로 탐구하고 느껴가야 하는 것이다.
* 최근들어 계속 생각해온 이것에 대해 술을 먹고 쓰게된 것에 조금은 미안함을 그리고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울러 덧붙여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지만 쓰기 힘들고 전달이 오히려 잘 안될것 같아 포기한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만난다면 재미난 예시들과 함께 뜨겁게 이야기해보길 바라며..
철학입문과 철학교육 - 이 정 우
‘入門’이란 하나의 가름을 뜻한다. 어떤 문을 열고 그 안에 들어서면 그 이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나는 갈라진다. 나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다양한 분절선들, 사건들, 우연들, 만남들을 통해서 마디를 가지게 된다면, 입문이란 이 마디들 중 중요한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바둑입문, 야구입문으로부터 문학입문, 철학입문, 물리학입문… 등 수많은 입문들이 존재한다. 이 입문들을 통해 우리는 늘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문 중에서 ‘철학입문’은 매우 특별한 성격을 띤다. 철학입문은 다른 입문들과는 달리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에 관련된 입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입문은 삶 자체가, 나아가서는 죽음 자체까지도 처음으로 반성적 의식의 수준에 포착될 때 성립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엔가 그때까지 막연히 가져 왔던 생각들이 와르르 무너질 때, 우리는 삶을 처음부터 다시 정초해야 할 상황에 부딪친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대개 10대 후반, 20대 전반에 걸쳐 발생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철학에 입문하게 된다.
다른 한편, 철학입문은 대단히 막연하고 모호하다. 철학에는 어떤 특별한 대상, 영역, 작업이 명확히 변별되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은 단지 무엇인가를 ‘밝히는[哲]’, 명료화하는 학문일 뿐이다. 그 이상의 아무 구체적인 규정도 없다(‘哲’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이 때문에 ‘철학입문’은 유난히 혼란스럽고 모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입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철학이라는 담론은 왜 이렇게 불투명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일까? 그러나 차분히 들여다보면 이 불투명성은 단지 복잡함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베르그송의 탁월한 설명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무질서로 파악하는 것들은 대개 너무 복잡한 질서일 뿐이다. 철학이라는 담론의 불투명성/복잡성은 이 담론의 규정 자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철학은 이른바 ‘메타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데 메타적인 문제는 일차적인 문제에 기생한다.
따라서 일차적인 문제들이 변하면 메타적인 문제들도 변한다.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은 좋은 예이다. 똑같은 문제가 그리스 철학과 중세 철학에서는 ‘제1 실체(개체들)’와 ‘제2 실체(보편자들)’의 문제로 나타났지만, 과학이 발달한 이후에는 ‘과학적 실재론(과학적 존재들, 예컨대 전자, 인력, 질량… 등등이 실재한다는 입장)’과 ‘과학적 유명론(이들은 이론적 창조물일 뿐이라는 입장)’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시간의 문제, 우연의 문제, 복수성의 문제… 등등이 모두 그렇다.
이것은 곧 철학적 담론들이 행하는 작업이란 곧 그것이 처해 있는 역사적 지평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음을 뜻한다. 철학의 문제들, 대상들, 개념들, 입장들은 언제나 역사 속에서 커다란 변이들을 겪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성을 완전히 捨象사상한 채 철학의 문제들을 일정한 추상공간에 옮겨놓고 논하는 것은 철학과 수학, 논리학을 혼동하는 것이다.
철학은 그 역사적 변동 전체를 전제한 뒤에야 성립된다. 이것은 곧 철학에서의 ‘문제’와 그 ‘역사’는 하나라는 것을 뜻한다. 철학의 역사는 문제들의 역사요, 철학의 문제들은 끊임없는 역사적 변이에 처해 있는 것이다. 문제와 역사의 이러한 통일성을 이해했을 때, 철학이라는 담론의 복잡성과 모호함은 상당 부분 명료해진다.
이런 사실은 철학입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 빛을 던져 준다. 철학입문은 흔히 ‘철학개론’과 ‘철학사’ 두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철학개론은 흔히 철학의 문제들과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며, 철학사는 철학의 역사를 압축해서 다룬다. 그러나 철학개론이 철학의 문제들과 개념들을 그 역사적 변이의 지평 위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의 문제들, 개념들의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변화들을 일정한 추상공간 안에서 왜곡시키게 될 것이다.
그런 철학개론은 철학의 문제들, 개념들을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의 눈을 투사해서 추상시킨 하나의 단면도일 뿐이다. 반대로 철학사가 철학의 문제들과 개념들의 형성과 변화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러한 철학사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독트린들’의 나열일 뿐이다. 한 철학자가 수십 권의 책을 통해서 말한 내용을 몇 쪽에 요약해 놓은 철학사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다.
한 철학자가 수십 권의 책을 통해 말한 내용을 몇 쪽에 요약해 놓은 철학사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다.
그것은 사유의 심각한 왜곡인 것이다. 요컨대 철학개론은 문제와 개념들의 역사적 지평을 드러내 주어야 하고, 역으로 철학사는 철학의 역사를 문제들, 개념들의 역사로서 재구성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방금 우리가 ‘문제와 역사의 통일성’이라고 불렀던 것의 의미이다.
앙드레 베르제와 드니 위스망이 쓴 《프랑스 고교철학》(원제는 《새로운 철학강의Nouveau “cours de philo”》)는 이런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은 여타의 철학개론들이 그렇듯이 철학의 역사성이 충분히 녹아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과 개념들을 일정한 사유공간으로 추상화하여 대표적인 독트린들을 비교함으로써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역사적 지평을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감독이 시공간을 파편화시켜 재조립함으로써 새로운 통일성을 만들어내듯이, 철학사의 흐름을 파편화시켜 문제별로 다시 재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저자의 창조성을 만끽할 수는 있겠지만, 역사의 ‘실재’는 그러한 재조직화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다. 독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독파하기 바란다.
철학교육의 딜레마
철학입문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들 중 하나는 철학이 ‘메타적’ 담론이라는 점이다. 메타적 담론이란 일차적 담론을 전제한다. 일차적 담론의 토대와 근원을 파고들어갈 때 결국 부딪치는 문제들이 메타적 담론들이다. 가령 철학은 ‘1+1=2’라는 가장 기본적인 수학으로부터 더 수준 높은 수학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왜 ‘1+1은 2일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질량, 운동, 힘… 등을 전제하고서 물리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본개념들 자체의 의미를 파고든다. 이렇게 일차적인 문제들을 파고들 경우, 우리는 결국 존재와 무, 연속과 불연속, 우연과 필연, 시간, 공간, 무한… 과 같은 메타적 문제들, 존재론적 문제들에 귀착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이 ‘메타적’ 담론이라는 것, 어떤 담론이든 근본을 파고들어가면 철학으로 귀착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철학입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메타수학을 한다는 것은 이미 수학 자체를 상당 수준으로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메타물리학을 한다는 것은 이미 물리학 자체를 상당 수준으로 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의 비결정성의 문제’를 다루려면 우선 양자역학을 알아야 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시간론’을 다루려면 우선 조이스를 읽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철학개론을 가르칠 때 부딪치는 힘든 문제는 철학 자체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철학 ‘이전의’ 지식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차적인 지식도 없는 학생들에게 메타적인 논의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 이것이 철학개론을 가르칠 때 부딪치는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이것은 철학사를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다. 철학사를 배우려면 우선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 등을 일정 수준으로 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플라톤을 읽으려면 우선 아테네 민주정치의 역사를 일정 수준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19세기 초의 해부학, 진화론(정확하게 말하면 ‘형태변이설’), 물리학 등에 대해서, 그리고 당대의 문학(예컨대 괴테와 횔덜린)과 미술과 음악 등에 대해서 상당 수준의 이해를 가져야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독파해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철학사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그저 몇 쪽으로 정리된 한 철학자의 독트린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암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철학사를 가르치려는 순간 이미 역사라는 망망대해에 떠 있게 된다는 것, 이것이 또한 근본적인 딜레마이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메타적인 논의들과 일차적인 논의들을 적절하게 융화시키는 것이다. 일차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메타적인 문제를 던진다든지, 아니면 역사적 지평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게 느닷없이 공자나 스피노자의 독트린을 제시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철학을 가르치기 때문에, 철학개론 시간이나 철학사 시간은 한없이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방식은 마치 팝송도 잘 못 듣는 학생들에게 메시앙이나 불레즈의 현대 음악을 들려주는 것과도 같다. 그런 시간에 졸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천재 아니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학생일 것이다. 그런 시간이 되지 않으려면 일차적인 지식들과 메타적인 문제들을 교묘하게 엮어내는 거의 곡예와도 같은 솜씨가 필요한 것이다. 극히 일상적인 예에서 시작해 문학, 미술… 등으로 나아가고, 결국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수준을 넘어 메타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초심자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프랑스 고교철학》은 나무랄 데가 없이 뛰어난 입문서이다. 어떤 문제를 다루든 매우 구체적인 사례와 과학, 문학 등의 다양한 문화적 토대를 깔고서 친절하게 초심자를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모두 39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간과 시간, 실존, 죽음, 자유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에서 출발해 욕망, 지각, 기억 같은 인성론적 문제들,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에 대한 과학철학적 논의들, 그리고 정의, 윤리, 덕, 사랑 등에 대한 실천적 논의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양한 소재들과 정교하게 엮어 전개시킴으로써 철학입문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책을 통독한다면, 독자들은 철학적 ‘문제틀’의 장을 조망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자신의 문제의식 또한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모범적인 프랑스의 철학교육
프랑스는 고등학교에서 본격적인 철학교육을 실시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프랑스 고등학생들(특히 졸업반)은 일주일에 9시간의 철학교육을 받는다(그래서 프랑스인들은 고등학교 졸업반을 ‘철학반classe de philo’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수준 높은 정신문화는 바로 이 철학교육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쌓은 철학 실력은 대학교에 들어갈 때 치르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바카롤레아’를 통해서 검증된다. 나아가 학자를 양성하는 최고의 대학인 ‘에콜 노르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에콜 노르말 준비반’에서 상당 수준의 철학을 먼저 배운다.
푸코가 이폴리트에게 헤겔 강의를 들은 것도 이 준비반에서이다. 요컨대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이전에 이미 상당 수준의 철학교육을 받는다.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조차도 플라톤의 《국가》, 데카르트의 《성찰》,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등등을(물론 발췌 형식이긴 하지만) 읽고 졸업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조차도 변변한 철학적 사유를 해볼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또 박사학위를 딴 사람들이 《논어》 한번, 《도덕경》 한번, 《화엄경》 한번 제대로 읽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우리의 교육현실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생들이 《프랑스 고교철학》 같은 수준 높은 책을 읽고 졸업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의 교육풍토가 부럽기만 하다.
한국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의식해서 ‘논술’ 고사를 만들어 학생들의 사유능력을 키우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지금의 논술고사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논술이라는 말의 개념이 잘못 정립되었다. ‘논술’이라는 말은 ‘dissertatio’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의 ‘논증술’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논술이란 논리학적, 철학적 사고능력을 기르는 과정을 뜻한다.
한국에서도 이 말이 처음에는 이렇게 이해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일부 이기적인 사람들의 영악한 ‘밥벌이’ 의식을 통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굴곡되어 버렸다. 지금 한국에서 치르는 논술고사는 ‘작문시험’이지 엄밀한 의미에서의 논술고사가 아니다. 말만 논술이지 내용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지식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모든 것이 학문적 판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해타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지금이라도 논술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입시의 불일치이다. 첫 번째 문제와 결국 맞물리는 문제이지만, 우리는 대학입시에서 논술고사를 치르면서도 고등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시험은 있는데 교육은 없는 이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등학교에서 제대로 철학을 배운 적이 없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논술고사를 치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논술고사는 작문시험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철학교육은 논술고사에 대한 개념적 왜곡과 고등학교에서의 철학교육 부재라는 두 사항이 서로 맞물리면서 모순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논술의 개념이 정상화되고 고등학교 철학교육이 본격화되어야만 한국에서의 ‘철학입문’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번역된 《프랑스 고교철학》은 이런 길로 나아가는 데 소중한 징검다리를 놓아 주리라 생각한다.
●이정우/《시뮬라크르의 시대》의 저자, 철학 분야 자유기고가
'雜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其.2 (0) | 2007.03.15 |
---|---|
천개의 공감, 김형경 (0) | 2007.03.13 |
사랑, 그 환상의 물매. 김영민 (0) | 2007.03.12 |
푸르른 틈새, 권 여선 (0) | 2007.03.11 |
아내가 결혼했다. 박현욱 (0) | 2007.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