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 김영민, 늘봄. 2007.2 其.2
‘천민적 자본주의‘의 몰개성적 物神은 그 자체로 저지할 수 없는 거대한 바퀴이자 인간을 ’뼈째’(너무 잔인한가?) 갈아대는 구조화된 위협, 협박이다. 벼랑에 까지 밀려왔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물신은 입이없으므로 FTA처럼 무조건 주고 조금은 받아 챙길 수 있는 그런 협상아닌 협상도 허용되지 않는다. 패배를 자인하고 산책에 나설 수 뿐이다. 이 책이 저항을 기도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된다. 자인이고 자해이며 따라서 자살을 충동한다. (오버... 지금은 밤의 기운이 충만하고 나는 술도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이다. 새벽이 깊을수록 나의 정신은 건조한 비등을 계속한다.)
제3장 핸드폰, 거울사회의 패티쉬
세상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으로서의 端末機가 자폐의 수단으로 변질또는 전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p79
....세상의 문턱에 걸려 넘어진 뒤 나르시즘과 사랑과 종교를 붙안고 돌아온 여자들...세상속으로 나아가는 문을 얻지 못한 채 기껏 세상을 구경하는 창으로 만족하는 태도, 혹은 그 창을 아예 거울로 바꾼 채 나르시스속에 자폐하는 현실.. 나는 이것을 ‘거울현상‘ 이라고 부르고 이 거울현상으로 뒤범벅된 사회를 ’거울사회‘라고 한다.
p.80
'핸드폰 하는 인간‘들의 거울사회속에서, 이윽고 핸드폰은 ..거울사회의 패티쉬, 그 物神이 된다.
저자는 핸드폰에 기능들이 중과되면서 유선전화의 고유적 기능이던 유일하게 ‘소리’만을 전달하던, 그래서 오히려 ‘표정’ 마저도 같이 실어나를 수 있었고, 그를 기대했던 그 비밀스런 진실이 점차 사멸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역설적으로 이미 핸드폰은 소리를 망각하고 단지 소음으로 전락했다고 질타한다.
제4장 혁명은 왜 배신당하는가
p131
한국 현대의 정치사에서 “친일”과 “독재”와 “부패”의 기원...
저자가 ‘개들의 정치‘라고 표현하는 한국정치의 현전은 그 뿐만 아니라 그 근저, 그리고 그 수면하도 마찬가지 일 것. 한 두정치인의 자백으로 순화될 일이 아니므로 결국은 그들이 우리 모두를 역설적으로 정화시킬 때까지, 즉 우리의 치욕을 대변적으로 공개함으로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타산지석의 경지를 기대할 뿐.
p135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를 꼽자면, 역시 개체교회들의 자본주의화 일 것이다. 物神과의 싸움에서 가장 견결해야할 (대형)교회의 물신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많은 설교자들은 세솓적 부의 축적을 영적체계속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때문이다.... 혹자가 성직자들을 일러 현대의 양반계급이라고 특칭햇듯이, 신자들 역시 영적 부르주아 계급으로 체계화 되면서.....
아마, 교회는 이미 환전상의 근거지로 된 사실을 이야기하나보다. 예수가 다시 돌이와 또 장쾌하게 뒤엎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제5장 용서는 없다.
p.173
루소는 그의 ‘사회계약론’(1762)에서 “인민이 자신들의 불행을 자초하더라도 그것을 방해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라고 항변한다. ‘자신을 파괴할 권리’의 문제는 그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아 단지 개인적 권리의 맥락에서만 논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자신의 인신에 대한 개인의 선택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제 6장 인문학의 무능, 무능의 인문학
p188
구조조정이라는 자본주의적 재편의 논리에 따른 소문은 흉흉하다. 그 가운데 인문학의 현상적 무능은 적나라하게 고발된다. 기계적 속도와 자본적 등가성의 시대에 소크라테스의 맨발로서 심우의 보행을 즐기는 인문학도들은 ‘시대의 외설'로 치부되고 만다.
제7장 건달인간론
p213
물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삶과 더불어 공생하고 있는 중세적 유토피아의식의 도착일 뿐 아니라 그것이 마른 오이처럼 졸아든 징후이다. 요컨대 조폭과 건달은 중세가 자본의 틈사위에 끼어있는 도착된 쾌락의 흔적이다.
p215
건달은 누구나 처럼 축제와 폭력의 세계를 동경하는 고중세적 감수성에 기대지만, 다만 노동이라는 산업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는 판타지인 것.
제8장 독신, 혹은 음탕한 주체
p246
굳이 나누어 살핀다면, 사랑은 ‘자율’과 ‘자연’에 가깝고, 혼인은 ‘제도’와 ‘계약’에 속한다. 이를테면, 연애는 情理이자 내용이면, 혼인은 合理이자 형식이라는 식으로 갈라지는 것이 통속적이다. 물론 로맨스의 여정이 혼인의 문턱에서 끝나도록 배치하는 신화적, 문화적 매너리즘도 이같은 통념을 반영한 것이다.
p247
사랑조차 제도에 얹혀 유형화, 표준화되는 판에, 반품율이 50%에 이른 혼인제도 따위에 무슨 ‘자연’과 ‘자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혼인제도는 늘 기성의 도덕이나 통치 이데올로기를 공식적으로 유통, 학습시키는 기본 단말기의 하나였으므로 체계의 차원에서 혼인을 자연화 시키려는 노력은 차마 집요할 수 밖에 없었고 , 이후로도 사회체계가 존속하는 한 그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을 聖事로 격상시키는 종교의식도,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세계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억척스러운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도, 모두 혼인의 작위성, 심지어 作爲性을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K.Millet나 알튀세르의 말처럼, 혼인제도는 학교나 사원, 혹은 군대등과 함께 기성 체계를 가동시키는 수레바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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