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The Painted Veil. William Somerset Maugham.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2007년 휴가의 첫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 창 너머 포도나무를 멍하니 쳐다보며 새로운 여름과 지나간 여름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생각타가 갑자기 이 소설을 읽을 생각을 했다. 철제 팬을 단 선풍기가 덜컥거리는 회전음을 계속하면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홍콩을 강점하고 있던 영국. 그리고 중국 오지에서 발병한 콜레라, 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다.
몸은 아시다 시피. 인간의 굴레(엄청난 감명을 받았던 책), 달과 육펜스(원서를 사놓고 읽지는 못했다) 등등의 작가. Summing up도 그런가.
‘옮긴이의 말‘에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은 강한 여성이 흔하지 않았던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통적 가치관 아래서 자란 여성이 결혼생활의 환상이 깨지고 외도의 아픔을 겪으면서 긍정적인 여성상을 모색한다는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국여성 키티 페인은 나이에 쫓겨 도피하듯 결혼을 한 뒤 매력적인 유부남 찰스 타운센드와 사랑의 불꽃을 태우지만 그에게 배신당하고, 부정을 알게된 남편의 협박에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의 오지마을로 끌려간다.....
p31
결혼 생활이 석 달도 채 못 되어 그녀는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p119
“나도 이제 그가 아는 것을 알겠어요. 당신이 냉정하고 무자비하다는 것도, 당신이 이기적이라는 걸, 표현 못할 정도로 이기적이라는 것도 알아요. 당신이 토끼만큼도 용기가 없다는 것도, 거짓말쟁이에다 허풍선이라는 것도, 비열하다는 것도 알아. 그리고 비극적인 건....”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비극적인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는 거예요.”
p120
" 난 내 가슴속에 죽음을 품고 두려움과 함께 가요. 월터가 그의 어둡고 뒤틀린 마음속에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공포로 떨리는 군요. 죽음이 진정한 해방일지도 모르겠어요. “
p125
그녀는 찰스의 정체가 다 드러난 지금도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만약 찰스에게서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한다면 이 세상 모든 걸 다 준다 해도 그의 품으로 달려가기 위해 아낄 것이 없었다. 그가 그녀를 희생시켰고 그녀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해도, 그가 아무리 무심하고 못되게 굴었다 해도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p173
그래도 그녀는 그를 사랑할 수 없었고, 무가치한 인간임이 명백하게 밝혀진 다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기나긴 날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그녀는 찰스 타운센드의 가치를 정확하게 매길 수 있었다. 그는 평범한 남자였고 그의 자질은 저급했다. 그녀의 가슴속에 아직 잔존하는 그 사랑을 산산조각 낼 수 만 있다면! 그녀는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p176
그녀와 그들 사이에는 장벽이 존재했다.... 갑자기 외로움이 이보다 더 절절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밀려왔다. 그것이 그날 그녀가 운 이유였다.
힘없이 고개를 젖히면서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 난 너무 무가치하구나.”
p183
그가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어떤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자 그녀는 그만 숨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의 고통은 이른바 상처받은 가슴... 바로 그것 때문이었을까?
p209
"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인생은 너무나 이상해요. 평생 오리 연못 근처에서 산 사람이 갑자기 바다를 구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약간 숨이 차지만 사기가 충천해 있죠.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어요.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걸 느껴요. 미지의 바다를 향해 출항하는 늙은 선원이 된 것만 같아요. “
p219
..그리고 그는 그녀를 용서할 것이다. 그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 지 얼마나 유감없이 그것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그녀는 알았다. 그가 앙심을 품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가 단지 용서를 구하기만 한다면 그는 그녀를 완전히 용서하리라.
p225
그녀는 그의 인간성에 몸을 던지고 자비를 구하고 싶은 본능이 일었다. 어쨌든 그들이 그 모든 일을 극복하고 공포와 절망의 무대 한복판에서 살아 있는 마당에 간통 같은 어리석은 짓거리에 연연해 한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어 보였다. 모퉁이 하나만 돌면 죽음이라는 놈이 감자를 땅에서 캐내듯 인명을 앗아가며 활개를 치는 이때에 누가 몸뚱이를 더럽혔네 어쩌네 하는 것에 신경을 쓰다니 바보 같은 짓이었다. 찰스가 그녀에게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그래서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일조차 얼마나 힘겨운지, 그에 대한 사랑이 그녀의 가슴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말라 버렸다는 걸 그에게 납득 시킬 수만 있다면!
P258
"월터, 제발 날 용서해줘요.“
그녀가 그 위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너무나 미안해요.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뼈저리게 후회해요.”
....
그의 핏기 없고 수척한 얼굴에 어떤 기색이 비쳤다. 그것은 움직임이러고 하기엔 미약했지만 무시무시한 발작에 버금가는 파장을 일으켰다.
...
그들이 들어왔다. 중국인 외과의가 침상으로 갔다. 그는 전기등을 들어 켜고는 월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눈을 감겼다.
P266
“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이따금씩 혼돈속에서 창조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그린 그림, 그들이 지은 음악, 그들이 쓴 책, 그들이 엮은 삶, 이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죠. 그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
P310
"난 인간 같지 않아요. 짐승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돼지나 토끼나 개 말이에요. 오, 당신을 비난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나도 나빴다는 거죠. 내가 당신에게 굴복한 건 당신을 원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건 진짜 내가 아니었어요. 난 그렇게 경멸스럽고 짐승 같은 정욕에 불타는 여자가 아니라고요. 난 그 여자를 인정할 수 없어. 그 침대에 누워 당신에게 헐떡거리던 건 내가 아니에요. 무덤 속의 내 남편은 아직 온기가 식지 않았고 당신 아내가 내게 그렇게 친절을 베풀었는데,....... 그건 사악한 악령처럼 어둡고 두려움에 찬 내 안의 짐승이었어요. 난 그걸 부인하고 증오하고 경멸해요.
P328
" 난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범한 실수를 그 애가 저지르지 않도록 잘 키우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릴 적 모습을 돌이켜 보면 제 자신이 싫어요. 하지만 제겐 기회라는 게 전혀 없었어요. 네 딸은 자유롭고 자기발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키울 거예요. 난 그 아이를 세상에 던져놓고는 사랑한답시고 결국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한 여자로 키우기 위해 평생토록 입히고 먹일 생각은 없어요. “
P329
과거는 끝났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묻어두자.... 그녀가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짓들과 그녀가 겪은 불행이 아마도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희미하나마 가늠할 수 있는 그녀 앞에 놓인 그 길을 따라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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