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讀

영원한 이방인

eyetalker 2005. 11. 2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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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원제 Native Speaker, 이창래

재미교포 이창래의 95년작, 영문소설을 번역본으로 읽다. 작가는 지금 프린스턴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원제는 ‘원어민’이란 뜻인데, 소설의 내용상 ‘원어민’이라는 말은 딱 들어맞는 사람과 결부되는 것 같지는 않으므로, 한국어 제목 ‘영원한 이방인’쪽이 더 내용에 가까운 제목일 듯하다. 뉴욕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다 이방인일 것이고, 몇 세대에 걸친 이종족간 혼인을 거쳐 그 신세대가 약간 희여멀겋거나 약간 까무잡잡해져서 표면상 동양인인 지 와스프 비스무리한 놈인 지 애매해지고, 뿌리는 까마득한 과거로 사라져 버리고, 나름의 새로운 정체성에 의문없이 만족해버리기 전까지는 누구나 이방인으로 살아갈 것이므로.

주인공은 부모가 도미한 직후 태어난 2세 재미교포이고, 한국어는 어눌한 편이다. 그러니까, 나고 자라면서 영어로 생활한 쪽이니까 영어가 훨씬 편한 사람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최고의 대학을 나온 바 있는 아버지는 뉴욕에서는, 법칙처럼, 야채, 청과상을 운영하고, 자란 그는 어떤 흥신소 같은 곳에 취직하여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의 뒷조사를 담당하게 되는 데, 그 대부분은 인종의 만물상이라고 할 뉴욕답게 제3국인, 주인공의 경우에는 동양인을 주로 담당하게 된다.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많은 부분 조사대상자를 곤경으로 몰아놓는 음흉한 흉계의 도구로서의 일이다.

주인공은 미국여인과 결혼하고 남자아이를 가지게 되나 아이는 어릴 때 사고로 죽게된다. 여자와 주인공은 구심점을 잃고 서로 방황하게 되나 다행히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

주인공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의뢰한 것인지는 모르나 현직 시의원인데다, 뉴욕시장자리를 노리는 재미교포 ‘강’의 뒷조사를 하게 되는 바, 그의 지지자 캠프에 자원봉사자로 끼어들어 신임을 얻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강’의 비리를 확보 하게 된다. 물론, 그 비리란 것은 대개의 정치인에게서 기대되는 바, 비릿한 돈거래 같은 것들이다. 어느 날 그의 캠프 사무실에서 폭발사고가 나고, 또 다른 신임 받던 젊은 자원봉사자 에두아르도가 폭사한다. 알고보니, 그 폭발사고는 그의 반대편, 즉 현직 시장이나 그의 패거리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 저 편에 매수된 에두아르도의 비밀을 파악한 ‘강’이 뉴욕의 한국깡패조직을 사주하여 저지른 것으로 암시된다.

‘강’에게서 동족적인 애정 같은 것, 인간적인 정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주인공은 비록 그리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국은 자신이 본사에 보고한 명단을 기초로 - 그러니까 시의원 ‘강’이 뉴욕의 한국인 상인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일종의 헌금자들 명단이다- 시의원 ‘강’의 비리가 언론에 밝혀지고, ‘강’은 언론과 여론의 비난에 무너진다. 심적 붕괴에 직면한 강은 술집의 어린 호스티스와 야간 음주운전 끝에 사고를 일으키고, 여자는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한다. 조사요원인 주인공이 속한 편의 궁극적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줄거리이다. 별 맛대가리도 없는, 그렇고 그런 편인 스토리라서 타각타각 찍어가면서도 무미건조 그 자체이다.

뉴욕의 평단이 극찬하고 - 헤밍웨이상도 받은 소설이다-있는 이소설이 한국어로 읽으면 무미건조한 이유는 무었일까?

이 소설의 번역본은 그 형식상 불가피하게, 엄청난 분량의 영어적인 표현과 이미지를 제대로 옮길 수 없어, 원서라야만 맛볼 수 있었을 ‘문장의 아름다움, 아니면 정교함 또는 멋부림‘같은 것 은 크게, 아니 거의 전부라고 해야, 희생하고 있다. 정확하자면, 이 소설은 ’영어로된 원서’를 영어를 상용하는 독자를 위한 소설이다. 따라서, 번역본은 아무리 잘 옮겨놓는 다고 해도 종이조각의 뭉치에 지나지 않을 위험을 감내해야한다.

유난히 이 번역본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그 내용상, 주인공이 한국인이란 것, 따라서, 가족사는 그 부모를 통하여, 떠나온 나라 한국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일의 대상이 한국계 정치인 이라는 것, 본인은 정작 미국여인과 결혼한 한국 남자란 것, 그가 근무하는 일자리는, 그리이스계, 일본계, 등등 각종 인종이 뒤섞인 곳이란 것, 주인공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문학적인 감수성이 뛰어난 화자라는 것(물론 작자의 뇌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등의 원인으로 한국적인 감수성과 대상들이 마구 혼합된 뉴욕의 어떤 미국적 상황을 (어렵게)영어로 서술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바람에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언어감각의 혼란에 빠져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반복하다면, 이 책은 할 수 있다면, 원제의 원서로 읽을 일이다. 아니라면, 무미의 활자읽기.

ㅈㅣㄴ

* 긴 휴가동안,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면서 캔 폴렛의 전쟁 쓰릴러 소설 Hornet Flight를 붙들고 있었다. 버스에서, 비행기 안에서, 침대위에서. 추리소설은 시간을 죽이는 데 특효인데다, 채워지지 않는 고독감(외로운 감정이란, 마치 자석의 한 극이 그런 것처럼, 외롭지 않고자 발버둥치면서 남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계속 끌어 댕기려고 하고 있으되 채워지지 않아 마냥 허망할 뿐이다.)에 까불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며 던져주는 팦콘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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