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讀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

eyetalker 2005. 11. 2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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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 계속 일찍 귀가 하고 있습니다. 하얀 건물에 잠시 들러 드레싱도 손보고, 처자들의 바늘 세례도 받고. 확실히 사람마다 손 맛이 다릅니다.



얼마전에, 여기서 소개받은 김영민의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를 읽다가 미션 이야기가 있어서, DVD로 빌려 봤습니다.



1986년 작이니 마침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해에 발표된 영화더군요. 그 이듬해 필리핀 마닐라에 출장가서 만난 거래처 친구 이름이 '사비에르' 였던 기억이 납니다.



18년 전이라.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15년이라는데. 그러면 15년전,그 이전에 저질렀던 모든 인간적 실수나 잘못도 이제는 면소된 것일까?



기억이 가물가물 하신 분들을 위한 미션에 대한 이야기.



1750년, 남미를 양분하고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애매하던 식민지국경선을 획정. 브라질은 지금도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중. 배경은 브라질,파라과이의 국경지대. 이과수 폭포상류에 살던 과라니 인디언 학살극을 배경으로한 예수회신부들과 수도사의 희생을 그린 종교성 짙은 이야기.




여기서 종교는 물론 카톨릭, 등장 핵심인물들이 Jesuit(예수회) 신부와 수사라는 것은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 제수이트는 1500년대 스페인의 기사였던 이구나티우스 로욜라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결성하여 교황의 승인을 얻은 수도회,전도회인 바, 이들의 저돌적 신심은 위선과 가식의 당대 국가권력, 종교권력과 마찰을 자아낼 수 밖에 없고. 저자거리에 우뚝 튀어나온 모난 돌 취급을 암암리에 또는 노골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는 것.

* 사비에르는 일본에 상륙, 기독교를 전하고, 중국 광동에서 사거.




영토획정문제의 마지막 결정권 전권을 쥔 파견주교는 본디 그 자신이 예수회신부였던 적이 있었으나 이제는 제도권 교황청의 대리인. 본인 스스로 실상과 결과를 예견하면서도 국가권력과 교황권의 타협을 대행할 수 밖 에 없다.




식민지에서 활동하는 용병이자, 노예상인 로드리고 멘도사. 연인 카를로타가 자신의 실제 펠리페와 동침한 장면을 목격하고 분개 끝에 동생을 칼로 살해. 계기로, 갑작스런 자기연민과 회한에 빠져, 수도원에 몸을 의탁, 묵언하며 죽음에의 길을 작정하나 가브리엘 신부의 ‘참회를 위한 봉사‘권유에 따라 신부들이 과라니 인디언의 땅에 세운 신앙공동체에 이른다.




수도회에 입교하여 수사가 된 로드리고. 버려진 무기는 강물 속에서 녹슬고.




포루투갈의 식민군대는 이제는 그들의 영토가 된 과라니 신앙공동체의 양도를 요구하고, 과라니인디언은 이에 반발, 무장투장에 나선다. 가브리엘 신부는 주교의 이양지시를 거부하나 스스로 무저항의 죽음을 작정. 남은 자, 아이들과 여인들을 모아 마지막 미사를 인도하며, 포루투갈 식민군의 총구를 향한 마지막 죽음의 행진끝에 전멸.




수사 로드리고는, 머뭇거리다, 순명의 서약을 파기. 이제는 녹슨 칼을 주워들고 과라니 인디언과 함께 공동체를 침탈하는 식민군에 맞선다. 가슴을 뚫는 총탄에 죽어가는 마지막. 그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면에서, 참회를 끝낸 그의 눈을 스치는, 목덜미에 총탄을 맞고 피를 튀기며 쓰러지는 신부 가브리엘의 잔영.




주교가 교황에게 보내는 사건의 전말보고서 형식을 띄고 있어, 비교적 담담한 느낌으로 영화보기를 마칠 수 있다.




사실 종교는, 영원불멸의 폭포수와 같이, 배경장치의 하나일 뿐, 주제는, 믿는 바, 세상의 위악에 대항하는 한 인간의 물러서지 않는 의지에 대한 찬가.




ㅈㅣ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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